독립기념관_2.5. 5관_나라 되찾기2
독립기념관_2.5. 5관_나라 되찾기2
# 존Ⅲ. 피 끓는 애국지사들의 의열투쟁1
# 의열투쟁의열투쟁
- '의열투쟁'이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한 의거로써 일제 침략자를 응징하거나 목숨을 끈는 순절로써 독립의지를 보여준 독립운동의 한 형태이다. '의사(義士)'란 성패와 관계없이 목숨을 내걸고 적에 대한 거사를 결행한 사 람을 말하고, '열사(烈士)'란 강력한 항의의 뜻으로 자결 및 그에 준하는 행동을 한 사람을 칭한다. 일제의 국권침탈과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국내외의 수많은 의사와 열사들이 의열투쟁을 전개했으며, 그 과정에서 옥고 를 치르거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 안중근의와 가족들. 어머니, 자녀, 아내.
◆ 한얼빈의거 관련 엽서
◆ 안중근의사 단지혈서 엽서
# 대한국인 안중근 #5250.
-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는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를 파괴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의사는 1907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 의병부대를 이끌며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2월에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여 독립투쟁에 대한 굳건한 의지를 다짐했다. 의거 후 곧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법정에서 의거의 정당성을 당당히 알렸으며, 옥중에서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여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진정한 세계 평화를 모색한 그의 사상을 담았다.
#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세한연후송백불조(歲寒然後松柏不彫)
◆ 안중근의사 기고글
- 서로 단합하여 국권회복에 힘쓰자는 취지의 글. <해조신문> 1908년 3월 21일자에 실렸다.
◆ 안응칠 역사
- 안중근의사가 1910년 옥중에서 작성한 자신의 일대기를 기록한 글이다.
◆ 이토 히로부미 죄악 15개조.
- 안중근의사 심문 과정에서 의거의 이유를 밝힌 것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 등을 한문으로 기록하였다. <1909.>
# 항일의거에 나선 의사들 # 5260.
-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을 지키기 위한 의열투쟁이 잇따랐다. 1907년에는 이완용·이근택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한 오적암살단이 조직되는가하면, 멀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08년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대한제국 외교문서이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의거를 거행했다. 1909년 국권 침탈이 눈앞으로 다가온 위기 속에 이재명의사는 일제의 한국 침략에 앞장선 이완용을 향해 칼을 들었다. 의열투쟁은 강력한 국권 수호 의지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 자결로 항거한 열사들
- 을사늑약, 경술국치 등 국권 침탈의 현실을 개탄한 일부 민족 지사들은 자결 순국의 길을 택했다. 주영공사 서리 이한응은 주영한국공사관 폐쇄에 항거하여 자결했고, 대한제국 대신인 조병세·민영환 등 을사오적 처단과 을사늑약 폐기를 주장하며 자결하여 의병전쟁 등의 항일운동을 격화시켰다. 1910년 경술국치에는 황현·정재건·장태수 등 애국지사들이 순국했다. 일제가 재는 '명치(明治)'의 현실은 살지 않겠다는 열사들의 순국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거부하는 강력한 의사 표시이자 주권 회복을 선언하는 강렬한 항일투쟁이었다.
◆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자결한 이범진.
◆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고 단식 순국한 장태수.
◆ 경술국치 당시 절명시를 남기고 순국한 황현.
# 의열단
-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은 1920년대 가장 활발한 의열투쟁을 전거한 단체였다. 단장은 김원봉이 되었고, 강세우·곽재기·권준·김상윤·배중세·서상락·신철휴·윤세주·이성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이 창립단원이었다.
의열단은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침략 원흉 응징 등을 활동목표로 설정하였고, 구축왜노·광복조국·타파계급·측정지권을 주요 이념으로 채택했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 등 일제의 고관 등을 처단대상으로 정하고,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주요 기관을 파괴대상으로 정하였다. 식민지 한국을 지배하는 중추기관을 파괴하고 그 수뇌를 처단한다는 것이었다. 의열단 단원들은 이 활동을 목표로 달성을 위해 국내와 일본 등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 의거를 일으켰다.
# 의열단의 폭탄반입의거
- 의열단은 일제의 침략기관 및 수뇌들을 파괴하고 처단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무기를 국내로 반입했다. 곽재기와 이성우의사는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폭탄·권총탄환을 구입, 국내로 반입해 밀양·창원의 동지들 집에 숨겨 놓았다. 십수 차례에 걸쳐 침략자들을 응징할 대량의 무기였으나 일제에 발각되어 의사들은 붙잡 히고 무기는 압수되었다.
1923년 3월에는 김시현·유석현·남영득의사 등이 다량의 무기를 국내로 반입 했다. 의사들은 경기도 경찰부의 경부 황옥의 협조를 받아 이 의거를 성사시켰다. 하지만 반입 후 황옥의 배신으로 의사들은 붙잡히고 무기는 압수되었다.
◆ 의열단의 경고문
- 조선총독부 근리에게 의열단의 독립운동을 방해하지 말 것을 경고한 글이다. <1923.1>
◆ 조선혁명선언
- 신채호가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항일투쟁의 노선을 이론화한 선언서이다. 무정부주의이론에 입각한 폭력혁명론과 민중직접혁명론을 주장하고 있다. <1923.1>
◆ 이수택의사 심문조서
- 경북경찰서에서 작성한 의열단원 이수택의사 심문조사와 의열단원 이일환 등의 체포에 대한 보고서와 공판청구시이다. <1924.3>>
# 영남지방을 무대로 한 의열단의거
-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의사는 부산경찰서 서장실을 방문해 그 앞에 폭탄을 떨어졌습니다. 이 의거로 경찰서장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기던 중에 사망했고, 의사는 붙잡혀 옥중에서 27세로 순국했다.
1920년 12월 27일에는 최수봉의사가 밀양경찰서에 2개의 폭탄을 투척했다. 경찰서장의 훈시 중 터진 이 폭탄은 좋지 않아 큰 피해를 주지 못했으나 일경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의거 후 붙잡힌 의사는 사형되어 순국했다.
의열단 부단장인 이종암의사는 1925년 국내로 들어와 동지 고인덕·배중세·한봉인 등과 경북지역을 무대로 군자금모금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의사들의 활동은 경북 경찰부에 포착되어 전원 붙잡히게 되었다. 고인덕의사는 일제의 고문으로 옥중 순국했고, 이종암의사는 폐결핵으로 가출옥했으나 곧 순국했다.
◆ 고인덕의사 판결문
- 최수봉의사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를 도운 의열단원 고인덕의사에 대한 판결문. <1921.5.>
◆ 최경학의사 판결문
-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을 체포된 의열단원 최경학_최수봉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한 일제의 판결문. <1921.3.>
# 서울을 무대로 한 의열단의거
- 일제의 침략기관이 가장 많은 서울은 의열단의 주요 의거 대상지였다. 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의사는 한국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했다. 의거 후 의사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리고 1922년 3월 다시 상하이의 황포탄에서 동지 오성윤과 함께 일본육군대장 다나카를 저격하는 의거를 벌였다. 하지만 의사들은 다나카를 처단하지 못하고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23년 1월 12일에는 김상옥의사가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이 의거로 종로경찰서는 크게 폭파되었고, 의사는 추격하는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마지막 한발 남은 탄알로 자결, 순국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국내로 온 나석주의사는 1926년 12월 28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했다. 하지만 의사가 던진 폭탄은 안타깝게 모두 불발되었고, 의사는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결, 순국했다.
# 의열의 일본 왕궁 앞 의거
- 1923년 9월 일본 관동지방의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일본인들은 재일동포를 무참히 학살했다. 이 소식을 접한 김지섭의사는 2개의 폭탄을 가슴에 품고 일본으로 갔다. 의사는 처음에 제국회의장을 목표로 정했으나, 회의가 무기한 연기되자 의거 장소를 일본 왕궁으로 바꾸었다. 왕궁 앞의 니쥬바시二重橋를 답사하는 중 일경이 검문하려 하자 의사는 그들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불행히 폭탄은 불발되고, 붙잡힌 의사는 지바千葉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옥중 순국했다.
◆ 나석주의사의 편지.
-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폭파의거 계획과 준비 등에 대해서 동지 이승춘에게 보낸 나석주의사의 편지. <1926.>
◆ 김구에게 보낸 나석자의삭의 편지.
- 김구의 안부를 묻고, 베이징에서 계획 중인 일은 조만간 진행될 것이라는 내용.
◆ 김지섭의사의 옥중 편지.
◆ 김지섭의사의 시집.
◆ 김지섭의사의 손수건.
◆ 김지섭의사의 이력서. <1915.>
◆ 김지섭의사의 순국 전보.
- 김지섭의사가 일본의 지바형무소에서 사망했으니 유품을 찾아가라고 가족에게 보낸 전보와 봉투. <1928.2.>
# 의열투쟁 단체들의 활동 #5310.
- 조국의 국권이 상실된 직후 의열사들은 의열단체를 조직해 투쟁했다. 국내에서는 1915년 대구에서 대한광복회가, 광복직전인 1945년 5월에는 서울에서 대한애국청년당이 조직되었다. 국외에서는 1918년 만주의 선양瀋陽해에서 27결사대, 연해주 수청에서 철혈광복단, 1926년 중국상하이에서 병인의용대, 1927년 중국 산시성에서 공명단 등이 조직되었다. 또 서간도 유하현에 본부를 둔 독립군단인 대한독립단은 구월산대를, 관전현에 근거지를 가진 광복군총영은 결사단 및 암살단과 같은 특파대를 의열단체로 조직해 국내에 파견했다.
대한광복회는 침략자 일제에 아부해 권력과 재산을 불린 친일파들을 처단했고, 27결사대는 조국을 팔아먹은 을사5적과 정미7적을 처단하는 것이 활동의 주목표였다. 만주에서 파견된 구월산대와 결사단 및 암살단은 일정한 지역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그 일대의 친일파 및 일제의 수괴를 처단하거나 평안남도 도청, 경찰서, 선천군청 등을 폭파하는 의거를 일으켰다. 또 철혈광복단과 공명단은 독립군 무기자금과 비행학교를 세울 목적으로 군자금 모금 의거를 일으켰다. 병인의용대는 상하이의 일본영사관을 폭파했고, 대한애국청년당은 1945년 7월 서울 한복판의 부민관을 폭파했다. 이 같은 의거에는 많은 여성 의열사들도 가담해 활동했다.
# 대련의거大連義擧
- 중국대륙 침략 야욕을 드러낸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도발하고 이듬 해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워 만주를 장악했다. 중국 정부는 이 사태를 해결하고자 국제 연맹에 제소했고, 국제연맹은 실상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했다.
한인애국단은 이 기회에 국제연맹 조사단을 마중하는 일제 고관을 처단해 우리민족의 항일독립의지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했다. 한인애국단에서는 일제의 고관을 처단할 목적으로 최흥식·유상근 의사를 파견했고, 이성원·이성발 형제와 함께 의거를 준비 하던 중 결행 직전에 체포되어 거사가 수행되지는 못하였다.
# 흥식군에게
- 기간 상하는 일대 수라장이 되어 출입이 극히 불편하여 교통이 단절되고 상업은 부진이나 그 곳에서라면 영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일화 2백원을 보내주어 소상업이라도 경영하게 했으나 아직 돈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분명치 않아 심히 초려하고 있다.
상품은 군이 기초를 정하고 통신하던지 군이 와서 가지고 가던지 형편에 좋은대로 하라.
졸자는 이번 전쟁하에서 투기 영업을 하여 대성공하였다.
지금부터 좀 더 대규모의 영업을 경영중이나 군들에게는 상업의 기초가 정해져야만 큰 신용이 있는 것이다.
무엇이던 생각대로 잘해 보아라. 반드시 신용에 중점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5월 30일 곽생郭生>
# 이봉창의거
- 한인애국단 최초의 단원인 이봉창의사는 김구에게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일왕을 처단하겠다고 자원하여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목에 걸고 입단식을 거행했다. 일본에 도착한 이봉창의사는 1932년 1월 8일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왕 히로히토를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다. 폭탄의 위력에 행렬은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불행하게 일왕을 처단하지는 못했다. 의거 후 의사는 체포되어 1932년 10월 일본의 이치가야市ヶ谷형무소에서 순국했다.
◆ 대한광복복회내력
◆ 댛산광복회 관련 판결문
◆ <고헌실기 固軒實記> 박위동 기증.
◆ 박상진의사 약력서
- 1910년대 국내의 대표적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회를 결성한 박상진의사의 약력을 적은 글. 박위동 기증.
◆ 이혜수의사 판결문 #5341.
- 김상옥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파 의거를 도운 이혜수李惠受의사에 대한 판결문. <1923.>
◆ 이관구 광복의용군 총사령 추대장.
-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했던 이관구李觀求의 대한광복군 총사령 추대장. <1945.>
◆ 공명단 활동 보도 기사
- 공명단의 일본 우편물 수송차량 공격을 보도한 <조선일보> 호외. <1929.4.20.>
◆ 공명단 단장 최양옥의사의 수기원고. #5344.
-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일제의 우편행랑 자동차 공격의거를 결행한 공명단 단장 최양옥의 수기 원기. <최돈영 제공>
# 아나키스트의 항일투쟁
- 1920년대 중반 한국독립운동진영에는 무정부주의운동이 수용되었다. 독립운동선상에 있어 무정부주의는 정부를 부정하는 이념이 아니라 공산주의운동에 대응하고 반인륜적인 폭련적 지배자, 즉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하고 이에 투쟁하는 논리로서 수용되었다. 일본에서는 1920년대에 박열·서상한. 김중한 양일동 등이, 중국에서는 이회영·신채호·유자명, 유림 등이 무정부주의 이념을 들여다보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1930년 4월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백정기·중앙창·이강훈 등이 남화한인청년연맹이라는 무정부주의 의열투쟁 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다.
◆ <탈환> 창간호
- 1928년 상하이에서 조직된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에서 아나키즘을 선전하기 위해 발행한 잡지. <1928..
◆ <시야김존진선생진是也金宗鎭先生傳 >
- 신만부·북만한인청년연맹·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등에서 활동한 아나키스트 김종진金宗鎭의 활동을 기록한 책자.
◆ 신채호 친필 편지
- 이준 열사의 의연회 결성에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으로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1912.>
◆ <우관문존 又觀文存> #5354.
- 이정규李丁奎가 아나키스트인 이회영·백정기 ·김종진의 약련과 활동 등을 기록한 책자.
◆ <박열의사 판결문>
- 1923년 일본 황태자 및 주요 인물을 처단하기 위한 준비 중 체포된 박열朴烈의사와 그의 부인 가네코후미코金子文子의 신문조서와 재판기록 등을 영인한 책자. <1977.>
◆ <이강훈옥중기>
- 백정기의사와 함게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를 처단하려 한 육삼정 의거의 이강훈李康勳의사가 옥중에서 쓴 글. <1942.>
◆ 백정기의사 인장
- 1933년 3월 주중일본고앗 이리요시有吉明을 처단하려 한 육삼정 의거의 백정기白貞基 의사가 사용한 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