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_2.5. 5관_나라 되찾기3
# 독립기념관_2.5. 5관_나라 되찾기3
# 존Ⅲ. 피 끓는 애국지사들의 의열투쟁2

# 한인애국단 활동
- 한인애국단은 1920년대 중반 이후 계속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또 한편으로는 만보산사건과 만주사변 등으로 침체된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를 거쳐 결성된 ‘임시정부의특무대’였다. 한인애국단은 결성 직후부터 단장인 김구의 주도하에 많은 활동을 했다. 그 결과 만보산사건 이후 악화된 한·중 양민족 간의 감정이 완화되었고, 또한 중국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협조가 이루어지는 등 임시정부 활동에 커다란 전기가 마련되었다.

# 한인애국단 선언서
- 왜적은 본 단을 가리켜 싸움하기를 즐긴다 하나 우리는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싸우기를 희망할 뿐이고 침략성을 가진 이름없는 싸움을 바라는 자가 아니다. 우리가 허다한 희생을 돌보지 않고 끝끝내 폭렬暴烈한 행동으로 대항하는 것은 우리 손에는 아무런 무기가 없고 사선死線을 쫓겨난 우리 한국 사람인지라 이 길을 버리고는 또 다른 길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독립이 성공되지 못하는 날까지 이런 폭렬한 행동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 본 단은 왜적 이외에는 어느 나라 사람이나 다같이 친우로 대하려 하며 절대로 이들을 害해치려 하지 않으니 이것은 홍구공원의 사건이 증명하고 있는 바이다.
-최崔, 유柳 두 의사義士의 사명은 동북을 침략하려는 적수敵首 즉, 관동군사령관 본장번本庄繁, 남만철도 총재 내전강재內田康哉, 관동청 장관 산강만지조山岡萬之助등을 죽이려 함에 있고 결코 국제연맹조사단에 해를 가하자는 것은 아니다.
- 우리 한민족은 신성한 민족의 후예요, 본 단은 순수한 애국 단체이다. 비록 죽는한이 있더라도 왜놈들과 같은 야만적 방법을 흉내내어 국제 문제를 일으키려고 하지 않는다.
- 본 단은 철저히 구국 단체로 오직 견고한 자립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분투할 뿐이요, 결코 어느 외국인이나 어느 외국 정부를 의뢰하지 않는다.
대한민국14년 (1932) 8월 10일.
한인애국단

◆ 월진회 창립 취지서
- 윤봉길의사가 고향인 예산에서 농촌부흥운동을 위해 결성한 월진회月進會의 취지서. <충의사 제공.>

◆ <염락濂洛>
- 윤봉길의사가 학문을 닦으면서 지은 한시를 묶은 시집. <보물 568호. 충의사 제공.>

◆ <기사년일기>
- 윤봉길의사가 1929년 음력 정월부터 이듬해 1월에 쓴 일기이다. 곳곳에 민족의 현실에 대해 분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보물 568호. 충의사 제공.>

◆ 윤봉길의사의 자필 이력서 및 유촉시
- 윤봉길의사가 홍커우공원 의거 결행 후 자필로 작성하여 김구에게 준 이력서 및 유촉시이다. <보물 568호. 충의사 제공.>

# 윤봉길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 # 5410
- 1932년 4월 29일 일제가 상하이上海 홍커우虹口공원 에서 거행한 일왕 생일 및 상하이사변 승전기념식장에서 일제의 침략 수뇌부들을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 윤봉길 의사의 사형틀
- 윤봉길의사가 일본 가나자와金澤 육군 형무소에서 총살, 순국할 때 몸이 묶였던 혈틀.

# 윤봉길의거 尹奉吉义举|尹奉吉義挙
- 충남 예산의 고향에서 야학과 농민운동을 전개한 윤봉길의사는 1930년 보다 원대한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 도착해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밝힌 윤봉길은 1년여 동안 일본인 거류지에서 채소행상 등을 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일본군이 '상하이사변' 승전 및 일왕생일 축하식을 거행한다는 정보를 입수, 의열투쟁을 결행할 것을 계획하고 윤봉길의사에게 이를 담당토록 했다. 윤봉길의사는 홍커우공원에서 거행되고 있는 기념식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
이 의거로 일제의 군부와 정계 요인 7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붙잡힌 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일본의 가나자와金澤에서 순국했다.

# 이덕주·유진식 의사의 조선총독 처단 의거
이덕주李德柱·유진식俞鎭植 의사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를 처단하라는 한인애국단장 김구의 명령을 받고 1932년 4월 국내로 파견되었다. 이덕주·유진식 의사는 한인애국단의 거사를 준비하던 중에 황해도에서 일경에 붙잡혀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 <김구선생혈투사> Kim Gu Seonsaeng Hyeoltusa
- 중국어판 <도왜실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1947년 제3판을 발간하면서 제목을 <김구선생혈투사>로 바꾸었다. <1947.>

◆ 유진식 의사의 이력서
- 조선총독 처단 의거를 결행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며 쓴 이력서.
◆ 이덕주 의사의 이력서.

# 선서문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 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宣誓人 윤봉길
한인에국단 앞
# 강우규 1859-1920
- 강우규는 1919년 9월 2일 신임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기 위해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해 환영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이토 齊藤實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 조선총독 처단이라는 애초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수많은 일제 관헌은 중경상을 입었다. 의거 후 의사는 몸을 피신해 있다가 일제에 붙잡혀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명부
- 1919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치보金致甫를 단장으로 결성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의 명부.

◆ 강우규 의사 판결문
-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처단하려다 붙잡힌 대한국민노인 동맹단의 강우규의사에 대한 판결문으로 사형선고에 대한 상고를 기각한다는 내용이다. <1920. 5.>

# 장진흥 1895-1930
- 만주와 러시아지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치던 1927년의 의거를 계획하고 국내로 들어왔다. 의사는 우선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파괴할 대상으로 정하고 여러 개의 폭탄이 들어 있는 나무상자를 은행창구로 배달했다. 은행원이 나무상자를 연 순간 폭탄은 폭발하여 여러명이 부상했다. 의거 후 붙잡힌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고 복역 수감 중 자결, 순국했다

◆ 장진홍 의사의 옥중 편지
- 조선은행 다구지점 폭파 의거의 주역 장진홍張鎭弘 의사가 대구형무소에서 장남과 사촌 동생에게 보낸 편지. <1929.>

◆ 이희춘 의사 유품
- 이희춘李喜春 의사가 일본군 부대에서 탈취하여 고등계 형사인 하봉길을 처단한 칼.
◆ 장진홍 의사 유품
- 장진홍 의사가 소지하고 다니던 칼.

# 양근환 1894-1950
- 1921년 2월 15일 양근환의사는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던 대표적인 친일파 민원식을 처단하였다. 민원식은 한민족의 분열을 꾀하기 위해 일제가 주장하는 참정권을 적극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의거 후 붙잡힌 의사는 도쿄 지방 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 양근환 의사 관련 자료. 인장 외.


# 한국광복군
- 1919년 4월 정부 직후부터 산하에 국군을 조직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0년대부터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미주동포들의 성금으로 재정을 마련하고 중국 군관학교 출신 한국청년들과 만주독립군 출신들로 구성된 인적자원을 마련해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한국광복군은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과 중국 내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인청년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하여 새력을 키웠다. 그리고 중국 시안西安에 총사령부를 두고 충칭·라오허커우·진화·푸양 등에 지대를 설치하여 항일무장활동을 펼쳤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이후 광복군은 미군 전력첩보관(OSS)과 국내진입작전을 위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인도·버마(현미얀마) 등에 파견되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광복이 그 날까지 조국의 자주독립군으로 활동했다.

# 존Ⅳ. 광복 직전 해외 무장투쟁

#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 #5430.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창설되었다. 창설직후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의 후난성·후베이성 등에서 포로심문, 대중국인 선전 활동 등을 전개했다. 그러나 1940년 말부터 일제와의 직접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주력부대가 허베이지역의 타이항산太行山 팔로군 근거지로 이동했고, 1941년 7월 현지의 한인청년들과 함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편성했다. 화북지대원들은 무장선전 활동은 물론 호가장관광 등을 전개했다. 1942년 5월 타이항산에서 중국공산당의 반소탕전에도 참전했으며, 7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어 중국공산당과 연계하여 활동하는 한편 군관학교를 건립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그를 바탕으로 많은 항일무장투쟁을 펼쳤다.
조선의 용대 창설 기념 (1938.10)

#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숙원사업이었던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이 중국 충칭의 자링빈관嘉陵賓館에서 거행되는 모습이다. 한국광복군 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金九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참모 김학규 등을 위시하여 임시정부요인 및 광복군 사령부 간부 전원이 참석하였고, 내빈으로는 각 기관을 대표하는 인사들과 충칭에 있던 외교사절 및 신문사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 한국광복군 훈련 모습
한국광복군에는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징병되었다가 탈출한 청년들이 많이 입대하였다. 이들은 조국 독립을 다짐하면서 힘든 훈련을 이겨내고 자랑스러운 한국광복군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광복군은 체력 훈련, 총기 훈련, 유격 훈련 등 다양한 훈련을 받았고, 육체적인 훈련뿐만 아니라 조국 독립을 향한 열망을 담은 정신교육도 실시하였다. 또한 미군과의 연합 작전을 위해 어려운 특수훈련을 소화해 내기도 했다.

# 한국광복군 창설.
-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의 윤봉길의사 의거 직후 8년 간의 이동시기를 거쳐 1940년 충칭에 도착한 후 임시정부의 숙원사업이 었던 한국광복군의 창설에 노력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5일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해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대내외에 알리고, 9월 17일 충칭의 자링빈관賓館에서 '한국광복군성립전례식'을 거행함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정식 군대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성립전례식 에는 김구를 비롯해 총사령관에 임명된 지청천, 중국의 류즈 장군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
# 한국광복군서약문 韓國光復軍誓約文
- 본인은 적성赤誠으로서 좌열左列 각항各項을 준수遵守하옵고
만일 배서背誓하는 행위行爲가 유하면 군軍의 엄중嚴重한 처분處分을 감수할 것을 자문에 선서하나이다.
一,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하여 헌신하고 일체一切를 희생하겠음.
二. 대한민국의 건국강령을 절실切實히 추행推行하겠음.
三, 임시정부를 적극 옹호하고 법령法令을 절대 준행遵行하겠음.
四, 광복군공약과 기율紀律을 엄수하고 장관 명령에 절대 복종하겠음.
五, 건국강령과 지도정신指導精神에 위배違背되는 선전이나 정치조직을 군내외에 행하지 않겠음.

# 한국광복군 편제
- 창설 당시 한국광복군의 편제는 총사령부뿐이었다. 총사령부 내에는 총사령과 참모장을 중심 으로 비서·참모·부관처 등 10개 처의 부서와 특무대 및 헌병대가 있었다. 총사령부는 성립직후 한인청년들에 대한 모집과 선전활동 등을 위해 시안西安으로 이동했고, 예하에 제1, 제2, 제3지대를 편성했다.
1941년 1월에는 독자적으로 항일활동을 펼치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제5지대로 편입시켜 4개 지대를 만들었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면서 편제가 개편되었다. 조선의 용대를 제1지대로, 기존의 1·2·5지대를 합쳐 제2지대로 편성했고, 기존3지대 겸 징모6분처를 승격시켜 3지대로 편성했다. 이외에도 한국광복군에는 제3전구공작대, 제9전구공작대와 일종의 보충대 성격의 토교대 등이 있었다.


◆ 한국광복군 배지.

◆ 한국광복군 신분증.
◆ 한국광복군 수창手槍 증명서

◆ 한국광복군 신분 확인서.
- 중국 쿤민의 미군 전략첩보국 본부에서 발행한 한국광복군 연락장교 김우전金祐銓 신분 확인서.

# 한국광복군의 훈련
한국광복군에서는 한국청년훈련반(한청반)과 한국광복군 훈련반(한광반)을 각각 설치하고 훈련을 실시하여 군사초급간 부로 양성했다. 시안西安에 설치된 한청반은 주로 화북일대에서 모집한 청년들을, 린취안臨泉에 설치된 한광반은 일본군을 탈출해 입대한 학병들을 훈련시켰다. 훈련의 종류는 군인이 기본적으로 익혀야 할 총검술과 유격 훈련은 물론이고, 기관 총과 소총을 비롯한 각종 총기를 다루는 법까지 다양했다.

◆ 한국광복군 공약 및 서약문
◆ 한국광복군훈련반 관련 김구의 공함.
◆ <한국역사요약>
- 한국 역사를 서술한 한국광복군 교육교재.
◆ 한국광복군 훈련교재 <정훈대강>

◆ <각국혁명사>
- 영국, 미국, 프랑스 3국의 혁명사기 기록된 한국광복군의 교육교재.
◆ 한국광복군 훈련기록
◆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진행계획.
- 한국광복군을 기반으로 중국정부와 연합, 공동작전을 전개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하고 조국의 광복을 쟁취한다는 등 총 16개항으로 구성된 임시정부의 군사진행계획. <1945..
◆ <국문철자>
-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서 간부 훈련용으로 만든 한글문법 교재. <1946.>

# 한국광복군의 활동
- 창설 후 한국광복군은 일본군에 소속된 한인병사와 적 후방의 한인청년을 모집하는 초모공작, 이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교란활동 등을 전개했다. 태평양 전쟁 직후에는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에 따라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연합국과 공동작전을 전개했다.
한국광복군은 인도, 버마전선에서 영국군과 함께 임팔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고, 1944년 5월부터는 군대 전략 첩보국(OSS)과 함께 국내진입작전을 위한 특수훈련까지 수료하고 1945년 8월에는 국내정진대를 편성했다. 일제의 항복으로 국내진공작전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국내정진대는 미국 18명과 8월 18일 여의도 비행장까지 들어왔다. 광복 후 한국광복군은 중국내 한인들을 조국으로 귀환시키는 업무도 수행했다.

◆ 한국 광복군 필요 ㆍ환문 초안
- 중국정부와 한국광복군 간에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할 것을 요구하는 <한국 광복군 요구사항>과 <환문 초안>

◆ 한국광복군판법에 관한 김구의 공함.
- 한국광복군에 대한 원조와 새로운 군사협정 체결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중국 국민당 비서장 우톄청吳鐵城에게 보낸 김구 주석의 공함. <1945.2.>

◆ 대일선전성명서
- 일제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임시정부의 명의로 발표한 대일선전성명서. <1941.12.>

◆ 한국광복군이 서명한 태극기.
- 독립기념관 입구 건물 오른쪽에 큰 크기로 재현했다.

◆ 원조한국광복군판법
-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을 폐지한 이후 한국광복군에 대한 지휘권을 환수하고 중국의 원조는 차관형식으로 변경한다는 내용으로 새롭게 체결한 군사협정. <1945.4.>
◆ 파인연락대派印連絡隊에 관한 협정 초안
- 1943년 8월 인도에 파견되어 영국군과 연합하여 대일작전을 수행한 한국광복군 파인연락대의 파견에 관해 영국군과 맺은 형정 초안. <1945.3.>

◆ <광복> 제1권 제2기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한국광복군에 대한 교육과 선전을 위해 발간한 한국광복군 기관지. <19421>
◆ <신한평론> 제12호
-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서 한국광복군 정신훈령용교재로 발간한 잡지.

◆ 한국광복군 국내특파원 임명장
-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알리기 위하여 국내에 파견한 특파원 임명장.

# 미주의 무장독립운동과 맹호군
- 미주지역에서 군인양성을 위한 노력은 1909년 6월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면서부터 구체화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국민군단사관학교(1914년 6월)-한인비행사양성학교(1920년 2월) 등이 설립, 운영으로 계승되었다.
미주지역 한인독립운동 연합단체로 결성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한인사회의 상무적 전통을 계승하여 상무적 전통을 계승하여 1942년 4월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국방경위대(일명 맹호군)을 결성하여 한국인의 대일항전 의지를 드높였다.

# 겨례의 불꽃.
# 맹호군
-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2월 독립군 단인 맹호군을 창설했다. 맹호군은 같은 해 8월 29일 경술국치 32주년을 맞아 로스앤젤레스 시청에 조선의 광복의지를 다스리고 태극기를 게양하는 현기식을 거행했다. 1943년 1월은 샌프란시스코에 맹호군 지부를 편성했다. 맹호군은 1944년 후반부터 미군 전략첩보국(OSS)의 납코프로젝트에 의해 국내전업을 위한 특수 훈련을 받았다. 비록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큰 성과를 얻지 못했으나 미주지역 한인들의 조선 독립에 대한 열의를 고려하는 활동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