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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섬서 역사박물관

2019_12_섬서(陝西)1_섬서박물관12_당번고도(唐蕃古道)12

by isanjo 2021. 8. 22.

2019_12_섬서(陝西)1_섬서박물관12_당번고도(唐蕃古道)12

 

 

銅印 당파 장관사인(長官司印)”

*黨壩鄉은 지금의 四川省 阿壩 藏族羌族自治州 馬爾康市이다.

- 淸代 乾隆 26

- 四川博物院藏

 

# 인주를 묻혀 종이에 찍은 실물이 하나 있었으면 더 좋았을 듯하다. 거꾸로 된 글자는 읽기도 어렵고...

 

 

銅印 작사갑포선무사인(綽斯甲布宣撫司印)”

*綽斯甲 3대 土司 이다.

<https://baike.baidu.com/item/%E7%BB%B0%E6%96%AF%E7%94%B2/22988297>

- 淸代 乾隆 40

- 四川博物館藏

 

銅印 송강 장관 사인(松岡長官司印)”

* 松岡長官의 관리 지역은 지금의 사천성 爾康耳縣 서쪽 松岡鄕이다.

 

- 淸代 乾隆 18

- 四川博物館藏

 

 

 

銅印 탁극기 장관사인(卓克基長官司印)

*卓克基는 티벳어로 "지고무상(至高無上:가장 높아 위고 없다)"이다.

* 지금의 사천성 爾康耳縣 동쪽이다.

- 淸代 乾隆 14

- 四川博物

 

은화(銀靴)_은으로 만든 신.

-

滉源古道博物院藏

 

 

 

# 당번회맹(唐蕃會盟)

사신단의 왕래

당나라와 티벳이 화친하게 되면서 두 나라 간에는 정치관계는 끊임없이 강화되었으며, 唐朝와 티벳의 조정은 사신 왕래는 점차 빈번하게 되었다. 양 조정의 사신 왕래는 朝貢, 議盟, 會盟, 修好, 和親, 告喪, 弔祭 賚詔, 封贈, 求請, 報聘, 慰問, 和約 등을 포괄한다.

634년부터 티벳은 수차례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왔으며, 9세기 중엽에 이르러 티벳왕조는 무너지게 되었다. 200여년간 당나라와 티벳은 200회에 가깝게 사신단을 파견하였다.

 

 

개원회맹비(開元會盟碑)

 

 

金城公主의 제청으로 733년 당나라와 티벳은 청해성 일월산(지금의 티벳 라싸 大昭寺 앞.)에 경계비를 세우고 互市를 진행하였다. “개원회맹비”의 碑文은 ?冊府元龜? 권979 「外臣部 和親 二」 등 역사문헌 속에 완전하게 남아 있다. 비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大唐 開元 21년 壬申年에 장인(唐 文武孝德皇帝)과 사위(大蕃 聖神贊普)가 우호를 쌓아 한 집안이 되었다.……지금도 영원히 이를 좇아 모두 새로우며, 그 뜻을 어기지 말라……赤嶺(日月山) 밖에 경계비를 세우니, 한결같이 옛 규정에 따라 지키고 살피며 사람과 교량을 통하게 하라.……”

 

 

 

당나라와 티벳의 회맹표(唐蕃會盟表)

 

706 : 양쪽 정부는 정부는 황하를 경계로 변경을 나누기로 약정한다.

714 : 양쪽 정부는 황하를 경계로 관할 구역을 나눈다.

733 : 양쪽 정부는 赤嶺을 변경으로 하기로 약정한다.

756 : 양쪽 정부는 장鴻臚寺에서 피를 마시고 회맹을 했다.

765 : 양쪽 정부는 장안 興唐寺에서 화해를 맹세했다.

767 : 양쪽 정부는 재차 장안 興唐寺에서 맹세했다.

783 : 양쪽 정부는 淸水에서 회명하고 和好를 약속하고 변경을 확정하였다.

787 : 양쪽 정부는 平凉에서 회명했다.

821 : 長慶會盟을 진행하였다.

 

# 위의 회맹표의 내용만 봐도 당나라와 티벳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힘이 없을 때는 회맹을 하여 안정을 기하고, 힘이 세지만 과감히 복속하는 자연의 섭리라고나 할까. 이후 티벳왕조는 무너져 唐宋 시기에는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졌다가 몽고와 元ㆍ明에는 중원의 지배를 받다가, 결국 청나라는 티벳을 속국으로 만들었고, 결국 중국은 티벳을 자국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으나 남북국시대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한반도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쳐 다시 남북국시대가 되었다. 역사는 정말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국가는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사라지고 그 곳에 살던 민족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