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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박물관/국립김해박물관27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6_2층_13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6_2층_13 # 가야 전사의 상징, 갑옷과 투구"방탄복과 헬멧을 착용하고 전투에 나가다"갑옷은 전투할 때 칼이나 화살을 맞지 않도록 몸을 보호해 주는 옷이다. 처음에는 가죽이나 나무로 만들다가 쇠를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철 갑옷도 만들었다. 갑옷은 철판 형태에 따라 판갑옷과 비늘갑옷으로 나뉘는데, 철판을 연결할 때는 못이나 가죽끈을 이용했다.방어 기능이 뛰어나고 몸에 딱 맞는 갑옷을 만들려면 최고의 기술이 필요했다. 갑옷에는 장식도 했는데, 새나 고사리무늬로 장식된 갑옷은 주로 영남 지역에서 확인된다. 지금 남아 있는 갑옷의 무게는 4~5kg 정도이지만, 쇠가 녹슬기 전에는 더 무거웠을 것이다.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는 세로로 길게 자른 철판을 가죽끈이나 못으로 연결해 만.. 2025. 2. 25.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5_2층_12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5_2층_12 # 철의 왕국 "가야" 철은 청동보다 단단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어 실용적이다. 평안북도 위원군 용연동의 초기 철기 시대 유적에서 중국 연나라(기원전 323~기원전 222) 화폐인 명도전과 철로 만든 물건이 함께 나와 이 시기에 철기 문화가 한반도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가야의 성장 기반은 '철'이었습니다. 고대 사회는 철이 널리 쓰이면서 사회가 변화 하고 발전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생산한 철은 화폐 처럼 쓰였으며, 낙랑과 대방, 왜(일본)에 수출되기도 했다. 가야 유적에서 나오는 덩이쇠는 크기나 모양이 일정해 물건을 사고팔 때 돈처럼 쓰일 정도로 해상 교역의 중요한 물품이었다.    #  말도 용맹한 전사이다."용감한 군인으로서.. 2025. 2. 24.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4_2층_11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4_2층_11 # 영혼을 위로하는 음식 "진지한 제물로 영혼을 달래다"무덤에 껴묻은 물건들은 가야의 다양한 문화를 보여 줍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다양한 모양의 토기는 죽은 사람을 기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토기에는 제사음식도 넉넉하게 담았을 텐데, 굽다리접시나 항아리에 남아 있는 곡물‧씨앗‧동물 뼈 등으로 당시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 니다. 즉, 가야의 먹거리는 물론 음식에 담긴 의미,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를 추정하는 단서가 됩니다.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제사상에 올리는 마음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 1.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_유개고배 有蓋高杯- 5세기- 함안 도항리(道項里)  ◆ 2. 긴목 항아리 바리모양 그릇 받침. 장경호長頸壺 발.. 2025. 2. 22.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3_2층_10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3_2층_10 # 따로 또 같이 한 나라로 합쳐지지 않았던 가야는 각기 자율과 공존이라는 특유한 문화를 만들었다. 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토기이다. 가야사람들은 지역별로 개성이 뚜렷한 토기를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 썼다. 굽다리접시‧긴목 항아리‧그릇받침‧뚜껑접시 등은 여러 가야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토기이다.그중 굽다리접시는 금관가야에서는 입이 바깥으로 벌어진 모양, 아라가야에서는 불꽃무늬 구멍으로 장식한 모양, 소 가야에서는 세모난 구멍을 낸 모양으로 저마다 개성을 드러낸다.   # 금관가야의 토기   ◆ 뚜껑 있는 굽다리 항아리1. 김해 양동리  2. 부산 복천동 3. 김해 망덕리  ◆ 넓은입 단지 / 그릇받침4. 김해 양동리 5. 창원 도계동  6.. 2025. 2. 21.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2_2층_9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2_2층_9 # 유물 진열 위치 및 이름 - 4~6세기   ◆ 손잡이잔_파수부배(把手附杯)1. 김해 윗덕정      2. 밀양 월산리3. 함양 몊정리      4. 함안 도항리5. 창원 대평리      6. 함안 황사리7. 밀양 귀명리      8. 김해 화정9. 합천 옥천         10. 창원 도계동11.울산 조일리     12.함안 오곡리13.밀양 신안        14.김해 대성동15.창원 현동        16.함안 윤외리(輪外里)17.김해 유하동 ◆ 잔(盞)18. 밀양 신안        19. 함안 황사리20. 밀양 귀명리    21. 창원 도계동(道溪洞)22. 창원 합성동(合城洞) ◆ 작은 그릇받침_소형기대(小形器臺)23. 함안 말이산    24. 고령 지산동.. 2025. 2. 20.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1_2층_8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1_2층_8 # 형태도 무늬도 가지각색 "다양한 형태와 패턴"굽다리접시는 중국에서는 '두'라고 하며, 제사 그릇으로 많이 쓰였다. 얕은 접시가 긴 굽다리 위에 붙은 모습으로, 가야 토기 중 가장 많이 발견된다. 굽다리접시는 굽구멍 모양 이나 무늬에 따라 가야 어느 지역에서 쓰였던 토기인지 알 수 있다.가야의 잔은 모양이 다양한데, 오늘날의 컵과 비슷해 '컵 모양 토기'라고도 한다. 보통둥근통 모양잔에 큰 손잡이가 붙어 있다. 굽다리잔은 굽다리 위에 입구가 넓은 잔을 붙이고, 굽다리에서 잔까지 이어지는 큰 손잡이를 달았다. 굽다리에 점토판을 붙이거나 작은 항아리 모양의 잔에 굽다리를 단 것도 있다.    # 글과 기호를 사용하다."가야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와 상징"종이를 발명.. 2025. 2. 18.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0_2층_7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0_2층_7 # 눈으로 한 번 귀로 또 한 번"도자기를 관찰하고, 듣고, 체험하다"잔 아랫부분에 흙구슬[흙으로 만든 방울알]이 들어 있어서 방울 잔이라고 한다. 먼저 구운 흙구슬을 넣어 잔을 만든 후 구웠다. 흔들 때마다 들리는 청아한 소리에 절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을까? 방울잔은 단순히 음료를 담아마시는 용도보다는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맛을 즐기는 용도로 보인다. 또한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쓰는 방울처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소리로 귀신을 쫓을 때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리와 맛을 함께 즐긴 가야인의 멋이 느껴지진다.이 딸랑이 컵은 바닥에 점토 공이 들어 있는 부분이 있다. 점토 공은 먼저 구워진 다음 나중에 구워진 그릇에 삽입되었다. 딸랑이의 점토 종에서 나는 맑.. 2025. 2. 16.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9_2층_6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9_2층_6 # "흐르는 듯 우아한 곡선의 아름다움" 가야 토기는 단단한 도질 토기와 무른 연질 토기로 나뉜다. 도질 토기는 깊은 굴 형태의 가마에서 1,000℃ 이상의 높은 온도로 구워 매우 단단한 회청색 토기로, 저장·의례·장식용으로 많이 쓰였다. 연질 토기는 얕은 구덩이 형태의 한뎃가마에서 낮은 온도로 구워 흡수성이 뛰어나고 무른 편이며 붉은색을 띠는 토기로,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였다.가야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도질 토기는 가야산 남쪽의 경상남도 일대와 호남 동쪽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그 생김새나 무늬가 매우 다양하다. 가야 각 나라에서 만든 토기는 모양은 다르 지만 한결같이 흐르는 듯 우아한 곡선이 아름답다. 가야 토기를 만드는 기술은 일본의 고대 토기인 스에키가 만.. 2025. 2. 15.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8_2층_5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8_2층_5 # 삶의 궤적, 조개더미 "조개더미를 통해 본 가야 사람들의 삶"2005년 발굴된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는 100개 층으로 구분 되며, 4단계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아래층인 100층에서는 기원 전후 무렵의 토기가, 맨 위층에서는 4세기 무렵의 단단한 토기[도질 토기]가 나왔다. 이는 이 조개 더미가 400여 년 동안 만들어졌음을 말해 준다. 조개더미 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온 토기, 뼈로 만든 도구나 장신구 970점, 점을 칠 때 쓰는 뼈 도구 101점, 동물 뼈 5,065점, 조개 껍데기 40종, 옥구슬과 철로 만든 물건들, 석기, 송풍관 등이 나와 당시 생활 모습이나 교류했던 지역도 추적할 수 있다.    #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발견된 유물. 1층.. 2025. 2. 13.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7_2층_4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7_2층_4  #  물고기를 잡고 조개를 캐다"물고기 잡기와 조개 모으기"가야사람들은 강이나 바다로 나가 먹거리를 장만 하기도 했다. 물고기를 잡고 해초를 따거나 조개를 캐려면 다양한 도구가 필요했다.대성동고분군과 주변의 조개더미에서 나온 크고 작은 낚싯바늘‧작살 등이 대표적인 고기잡이 도구이다. 그물이 물속에 가라앉도록 그물에 매다는 어망추는 가야 사람들이 그물을 썼음을 보여준다. 갯바위나 갯벌, 얕은 바다의 바위 등에 사는 조개와 해조류를 캐고 손질할 때 쓰는 쇠로 만든 도구도 있었다.   ◆ 12. 쇠도끼_철부(鐵斧)- 3~5세기- 김해 퇴래리, 대성동 / 창원 중동  ◆ 6. 쇠작살_철섬(鐵銛)- 3~5세기- 김해 양동리  ◆ 7. 그물추_어망추(漁網錘)- 3~5세기-.. 2025. 2. 12.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6_2층_3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6_2층_3   # 땅을 일구고 수확하다 "땅에 씨를 뿌리고 작물을 수확하다"한반도 남부는 북부보다 철기 문화가 늦게 들어와서 쇠로 만든 농기구도 뒤늦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풍부한 철과 뛰어난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도끼·괭이·낫 등 중요한 농기구들을 모두 쇠로 만들었다. 나무로 만든 손잡이는 거의 썩어 없어졌지만 드물게 남아 있는 손잡이가 있어 연결 방법을 추측할 수 있다.농사기술이 발전하면서 U자형 삽날이나 쇠스랑· 호미·살포와 같은 농기구도 등장한다. 쇠로 만든 농기구가 널리 쓰여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었다.    ◆ 10. 뼈괭이_골제확(骨製鑊)- 4~5세기- 창원 중동(中洞)  ◆ 8. 쇠삽날_삽인(鍤刃)_쇠가래날- 4~5세기- 밀양 미촌리(美村里) / 김해 대성동 / 김.. 2025. 2. 10.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5_2층_2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5_2층_2 # 질박하고 검소한 "가야 사람들의 삶" 가야사람들은 주로 움집이나 초가집에서 살았지만 2층으로 만든 다락집에서 살기도 했다. 가야사람들의 집터에서는 부뚜막과 음식을 찌는 시루, 이동식 부뚜막 토기도 발견된다. 가야 사람 들은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얻었지만, 고기잡이와 조개 채집도 여전히 중요했다. 김해 봉황동(옛 회현리), 부원동뿐만 아니라 내륙 지역인 고령에서도 바다 생선 뼈와 조개껍데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가야 사람들은 낙동강을 통해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 가야도성과 궁성의 모습이 드러나다.가야의 도성과 궁성은 고고학 조사로 그 모습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봉황토성은 금관가야의 도성과 궁성 구조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봉황토성 안.. 2025. 2. 8.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4_2층_1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4_2층_1 # 화합과 공존으로 일궈 낸 가야인의 역사와 문화. # 가야의 멋 화려한 장신구는 아름다움을 더하고 그 주인의 정치·사회적 지위도 나타낸다. 가야 사람들은 수정·호박·마노 등의 보석과 유리·금속 등으로 장신구를 만들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 함안 말이산고분군, 고령 지산동고분군 등 가야왕들의 무덤에서는 일찍부터 초록색·푸른색·붉은색 등 다채로운 유리구슬 목걸이가 나왔다.4세기 이후에는 금과 은으로도 장신구를 만들었는데,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나온 금동관과 허리띠가 대표적인 예이다. 5세기 중엽 이후에는 다양한 귀걸이와 팔찌가 만들어져 가야사람들의 세련된 멋과 노련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금동관 *보몰- 5세기- 부산 복천동(福泉洞) 가야 금동관은 신라의 화려.. 2025. 2. 7.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_핸폰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_핸폰 ◆  ◆   ◆ ◆ ◆ ◆ ◆ ◆ ◆ ◆ ◆    # 아름다운 소품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025. 2. 6.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3_1층_13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3_1층_13 4. 신라세력의 확산2 # 가야에서 신라로신라의 짧은 굽다리접시와 굽다리 긴목 항아리는 6세기 중엽에 유행했던 대표 적인 그릇입니다. 이 무렵 가야 여러 나라의 무덤에도 이러한 토기를 껴묻기 시작 합니다. 무덤의 형태도 돌덧널무덤에서 신라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 같은 변화는 김해, 함안, 고성, 합천, 고령 등 옛 가야 지역의 무덤에서 나타 나는 고고학적 현상입니다. 가야가 신라의 지방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상징 적으로 보여줍니다.   # 금관가야1. 김해 화정.2. 김해 원지리.3. 부산 두구동.4. 창원 다호리.5. 창원 가음정동. # 대가야6. 고령 지산동.7. 합천 삼가. # 아라가야8. 함안 소포리. # 소가야9. 고성 내산리. #  ◆ 1.. 2024. 11. 13.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2_1층_12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2_1층_12 4. 신라세력의 확산1남해안 바닷길의 중개교역을 바탕으로 발전한 금관가야는 4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400년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신라의 팽창에 영향을 받기 시작다. 낙동강 동쪽에 자리한 비화가야부터 신라문물이 확산되었고 532년에는 금관가야의 왕 김구해가 신라에 항복했습니다. 신라는 낙동강 서쪽으로 계속 진출하여 마침내 562년 대가야를 정복함으로써 가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가야의 다양한 문화는 신라의 지방 문화로 바뀌었는데, 옛 가야 지역의 유적과 유물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1. 굽다리 긴목 항아리- 5~6세기- 창녕 교동/계성리             ◆ 2. 굽다리 바리- .. 2024. 11. 12.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1_1층_11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1_1층_11 3. 가이의 발전2   # 아라가야와 대가야의 발전아라가야의 성장은 함안 말이산고분 유적과 유물에서 잘 드러난다. 불꽃무늬구멍굽다리접시가 특징이며 말갑옷·고리자루 큰칼·미늘쇠 등 많은 철제품이 확인된다. 5세기 동안 큰 전성기를 누렸으며, 6세기 낙동강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의 압박에 대항하여 가야 세력의 결속을 도모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령을 중심으로 성장한 대가야는 5세기 후반 가야 최대 세력으로 부상해 중국 남제(南齊)에 직접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대가야는 가야 세력 중 유일하게 토기뿐만 아니라 독자적 양식의 무기와 금공예품을 갖추어 그 위세가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장수, 남원, 순천 등 호남 동부 일부 지역의 큰 무덤에서 발견된 대가야.. 2024. 11. 11.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0_1층_10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0_1층_10 3. 가이의 발전1변한(弁韓)의 여러 작은 나라에서 출발한 가야는 발달한 철기 생산 능력과 남해안 바닷길 중개 교역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차츰 축적된 국력과 나라 안팎으로 높아진 위상은 마침내 큰 변화를 불러왔다. 3세기 후반 무렵 지배계층 무덤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모습에서 그러한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큰 무덤을 만들고 많은 재물을 장례에 소비했을 뿐만 아니라 순장 풍습도 나타났다. 4세기는 금관 가야의 눈부신 성장이 주목된다. 5세기 이후에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아라가야, 소가야가 함께 발전했다. 옛 가야 지역 곳곳에 남은 커다란 무덤과 다양한 출토 유물은 당시 지배자들의 우월한 경제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 단단한 토기의 등장, 그리고 .. 2024. 11. 10.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9_1층_09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9_1층_09 2. 가야의 여명3 # 옻칠_빛깔 입은 목기 옻칠은 목기의 장식성과 기능성을 한껏 높이는 기술로, 옻칠한 나무는 윤이 나고 표면이 매끈해질뿐더러 습기, 열, 부패에 강하다. 목제품뿐만 아니라 토기, 가죽, 쇠붙이 등에도 칠을 발라 그 효과를 기대했다. 옻나무 수액을 채취하고 정제해서 칠하기까지 과정은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들어 당시 칠기는 매우 귀하게 여겨졌다. 널무덤에서 발견된 칠기는 무덤 주인공의 사회적 경제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 옻칠한 굽다리 접시 제작 과정. *재현품.   ◆ 1. 옻친한 부채 *복제품.- 원삼국시대- 창원 다호리.   ◆ 2. 옻칠한 부채 *복제품.- 원삼국시대- 창원 다호리. ◆ 1. 옻칠한 칼집과 쇠칼. *복제품.- 원삼국.. 2024. 11. 9.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8_1층_08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8_1층_08 2. 가야의 여명2 # 와질토기(瓦質土器)_제작 기술의 혁신기원전 1세기 무렵 한반도 중부와 남부에서는 지역별로 독특한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영남지역에서는 ‘와질토기'가 등장한다. 질감이 기와와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회색, 회흑색을 띠며,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기에 제사 그릇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릇의 모양은 주머니단지, 쇠뿔모양 손잡이 항아리 그리고 짧은목 항아리 등이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굽다리를 붙이거나 화로 모양 그릇받침이 나타나는 등 형태와 종류가 다양해진다.   ◆ 1. 보시기_완(盌)- 원삼국시대- 창원 다호리.   ◆ 2-1. 주머니모양 항아리-대상호(袋狀壺) - 원삼국시대 - 창원 다호리/반계동, 김해 구지로.   ◆ 2-2... 2024. 11. 8.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7_1층_07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7_1층_07 2. 가야의 여명1 청동기시대 막바지에 이르러 옛 가야 지역 곳곳에 나타난 덧띠토기문화와 더불어 새롭게 확산된 철기문화는 사회변동을 재촉했다. 하지만 새로운 문화는 이전부터 뿌리내린 지역문화를 완전히 압도하지는 못한 채 일정 기간 공존하면서 서서히 퍼져나갔다.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도 바뀌었다. 새로이 등장한 널무덤에서 널리 확인되는 철 제품과 와질토기가 대표적이다. 무덤에 넣은 껴묻거리 종류와 양이 많아진 것도 청동기 시대 고인돌에서 찾아볼 수 없던 큰 변화이다. 주변 지역과 교류도 활발해져 각 지역 공동체들은 새로운 선진문물을 경쟁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가야로 발전해 나갔다. # 철기의 사용철은 고대사회 형성과 변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광석에서 추출한 .. 2024. 11. 7.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6_1층_06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6_1층_061. 가야 이전 사람들의 삶5  # 민무늬토기- 청동기시대 살림살이_무문토기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사용한 그릇은 민무늬토기無文土器입니다. 민무늬라 하지만 아가리 겉면에 짧은 선이나 구멍 등 간단한 무늬를 새기기도 했습 니다. 바리·대접·접시·항아리·독 등 필요한 용도에 따라 생김새가 다양 하지만 바닥은 대체로 납작합니다.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와 마찬 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른 특징을 보이며 꾸준히 사용되었습니다. ◆ 1. 바리_발(鉢)- 청동기시대- 진주 대평리  ◆ 2. 바리- 청동기시대- 산청 소남리 ◆ 3. 바리- 청동기시대- 울산 교동리   ◆ 4. 바리- 청동기시대- 울산 서부동.   ◆ 5. 접시- 청동기시대- 진주 대평리   ◆ 6. 항아리 - 청동.. 2024. 11. 6.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5_1층_05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5_1층_05 1. 가야 이전 사람들의 삶4 # 농경과 마을의 탄생_농촌의 출현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 조·기장 위주의 소규모 잡곡 농사와는 달리 벼농사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면서 큰 규모의 마을이 생겨났다. 여러 채의 움집, 논과 밭 마을 전체를 두른 도랑이나 울타리가 청동기시대 마을 풍경이다. 농사가 가장 중요한 생업수단으로 정착하면서 땅을 일구고 수확 하는 도구들도 발달했다. ◆ 동심원이 그려진 바위 그림- 청동기시대- 밀양 상동면 안인리 *경남 밀양시 상도연 안인리 신안마을의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된 바위 그림이다. 지름 7cm 내외의 동심원 세 겹 아래로 검이 새겨져 있다. 동심원은 모든 생명의 근원인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 2024. 11. 5.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4_1층_04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4_1층_04 1. 가야 이전 사람들의 삶3 # 문화사 연표- 구석기시대부터 가야까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을 기준으로 설명한 문화사 연표. BP : 현재(1950)년 이전BCE: 기원전CE: 서력 기원후 # BP : 700,000 - 한반도에 인류 등장. - 뗀석기 사용. - 수렵채집사회. ◆ 1. 돌남몸돌- 구석기- 밀양 천황재 ◆ 3. 격지- 구석기- 밀양 천황재. BP : 40, 000- 후기 구석기- 돌날문화 성행. ◆ 2. 돌날- 구석기 후기- 밀양 천황재 # BCE: 8,000- 신석기시대- 토기 등장- 간석기 사용- 움집생활- 초보적 농사 시작. ◆ 1. 빗살무늬토기- 신석기- 진주 상촌리  ◆ 2. 결합식 낚시바늘- 신석기- 울산 세죽, 통영 연.. 2024. 11. 4.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_1층_02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_1층_02 1. 가야 이전 사람들의 삶1  1. 가야 이전 사람들의 삶1 낙동강 하류 일대는 가야인들이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킨 삶의 터전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인간 활동의 흔적은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석기인들은 먹거리를 찾아 옮겨 다니며 이동 생활을 했다. 신석기시대에는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살며 물고기나 동물을 잡고, 식물채집으로 먹거리를 얻었다. 간석기와 토기를 사용하였고 초보적인 농사도 지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청동기와 간석기, 민무늬토기를 사용하였다. 벼농사 등 농경이 본격 적으로 발달하고 낮은 구릉이나 평지에는 큰 마을이 들어섰다. 거대한 고인돌은 농경사회 마을 공동체 의식이 크게 성장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가장 오래된 삶의 흔적.. 2024. 11. 2.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_1층_01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_1층_01 # 1층 핸드폰 사진. 2024. 11. 2.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0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0  # 가야누리_어린이박물관.   # 가야 GAYA _가야토기 모양을 활용한 간판.  # 박물관 입구 건너편에 유물 모형이 벽에 전시되어 있다. # 오리문양 토기. # 뿔잡이 항아리.  3 굽다리 접시.  # 호랑이 모양 띠고리.  # 청동 거울.  # 통모양 청동기.  # 가락국 역사연대표.   # 기마인물형토기.  # 박물관 전경.  # 가락국기비(駕洛國記碑)   # 청동 방패꾸미개.  # 화천(貨泉)  # 원통모양 그릇받침.  # 자루칼.  # 새무늬 청동기.  # 판갑- 가야무사의 기개. # 미늘쇠.  # 수레바퀴모양 토기.  # 박물관 입구 2024. 1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