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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박물관221

독립기념관_2.6. 6관_새로운 나라3 # 독립기념관_2.6. 6관_새로운 나라3 # 존II.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다. 2 # 교육 문화 활동 # 군사활동과 의열투쟁 #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운 외국인. #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운 피치 가족. # 임시정부 요인의 피신을 도운 추푸청 가족. 존 III. 상하이를 떠나 충칭까지 이동하다. # 8년간의 중국대륙 이동. # 임시정부의 존립 위기와 극복 # 중일전쟁 발발과 독립운동 세력 통일. 2025. 7. 14.
독립기념관_2.6. 6관_새로운 나라2 # 독립기념관_2.6. 6관_새로운 나라2 # 존II.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다. #6080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수립 이후, 1932년 4월까지 상하이에서 활동하였다.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을 지휘하는 최고기관으로서 정부 조직을 유지·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국내의 국민들과 연계망을 구축하는 한편, 재정확보와 외교활동, 교육 및 문화활동, 독립전쟁을 위한 군사활동 및 의열투쟁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 # 2025. 7. 9.
독립기념관_2.6. 6관_새로운 나라1 # 독립기념관_2.6. 6관_새로운 나라1 # 새로운 나라 #6010 - 1919년 3월 1일 독립국임을 선언한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4월 11일 독립국으로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인 새로운 나라였고,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 정부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가와 정부로 역할하면서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를 발전시켰고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 독립운동을 통해 나라를 되찾는 성과를 거두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재건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 존 I.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세우다 #6020 - 반만년 역사의 대부분은 군주가 나라의 주인이었다. 1910년 8월 멸망한 대한제국도 군주의 나라였다. 독립운동 과정에.. 2025. 6. 21.
독립기념관_2.5. 5관_나라 되찾기3 # 독립기념관_2.5. 5관_나라 되찾기3 # 존Ⅲ. 피 끓는 애국지사들의 의열투쟁2 # 한인애국단 활동- 한인애국단은 1920년대 중반 이후 계속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또 한편으로는 만보산사건과 만주사변 등으로 침체된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를 거쳐 결성된 ‘임시정부의특무대’였다. 한인애국단은 결성 직후부터 단장인 김구의 주도하에 많은 활동을 했다. 그 결과 만보산사건 이후 악화된 한·중 양민족 간의 감정이 완화되었고, 또한 중국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협조가 이루어지는 등 임시정부 활동에 커다란 전기가 마련되었다. # 한인애국단 선언서- 왜적은 본 단을 가리켜 싸움하기를 즐긴다 하나 우리는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싸우기를 희망할.. 2025. 6. 20.
독립기념관_2.5. 5관_나라 되찾기2 독립기념관_2.5. 5관_나라 되찾기2 # 존Ⅲ. 피 끓는 애국지사들의 의열투쟁1 # 의열투쟁의열투쟁 - '의열투쟁'이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한 의거로써 일제 침략자를 응징하거나 목숨을 끈는 순절로써 독립의지를 보여준 독립운동의 한 형태이다. '의사(義士)'란 성패와 관계없이 목숨을 내걸고 적에 대한 거사를 결행한 사 람을 말하고, '열사(烈士)'란 강력한 항의의 뜻으로 자결 및 그에 준하는 행동을 한 사람을 칭한다. 일제의 국권침탈과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국내외의 수많은 의사와 열사들이 의열투쟁을 전개했으며, 그 과정에서 옥고 를 치르거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 안중근의와 가족들. 어머니, 자녀, 아내. ◆ 한얼빈의거 관련 엽서◆ 안중근의사 단지혈서 엽서 # 대한국인 안중근 #5250. - 190.. 2025. 6. 19.
독립기념관_2.5. 5관_나라 되찾기1 # 독립기념관_2.5. 5관_나라 되찾기1 # 나라되찾기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후 우리민족은 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국내외 각지에서 다양한 이념과 방략으로 투쟁했다. 그 중의 하나가 일제를 상대로 직접적인 무장투쟁을 펼친 독립운동가 들의 활동이었다. 항일무장투쟁은 세 분야에서 전개되었다. 서북간도 등 만주지역을 근거로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군의 활동, 개인 또는 단체를 이루어 일제의 침략기관을 파괴하고 주요 인물을 처단한 의열투쟁,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로 창설된 한국광복군의 활동이 그것이다.19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서북간도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은 독립군기지를 개척하고 항일무장 투쟁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 기반을 토대로 양성된 수많은 독립군들은 국내진공 유격전을 펼쳤고, .. 2025. 6. 18.
독립기념관_2.4. 4관_평화누리 # 독립기념관_2.4. 4관_평화누리 # 존Ⅰ. 다짐의 길# 독리운동이란 무엇인가? # 혁명을 위해광복군의 앞길을 위해여성의 권리와 의무를 위해광복군에 용감히 참가합시다 #잃어버렸습니다.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길에 나아갑니다.……내가 사는 것은 다만,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존Ⅱ. 실천의 길 #4050 일제의 침략이 19세기 말부터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50년 동안 우리 겨레는 신분계·종교·이념 등을 향해 나아가는 민족의 광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국내는 물론 중국·러시아·미국·유럽 등 우리 겨레가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자유와 평화를 지향하며 전개된 우리 겨레의 독립운동은 세계인의 공감을 얻고, 시아파에서 지지까지 이끌어냈다.. 2025. 6. 17.
독립기념관_2.3. 3관. 겨레의 함성2 # 독립기념관_2.3. 3관. 겨레의 함성2 # 다양한 독립운동의 주체로 우뚝 서다. - 우리 겨레 스스로 이루어낸 3·1운동은 역사의 거대한 분수령이 되었다. 3·1운동 과정에서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공화정 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3·1운동으로 1920년대 이후 노동 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 등이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여성, 노동자, 농민, 천민,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의 저변이 확대되어 다양한 계층이 대중투쟁을 이끌었다. 3·1운동을 분수령으로 하여 민중은 독립운동의 주체로서 우뚝 설 수 있었다. # 3 ·1운동이 새롭게 쓴 독립운동의 역사. #3210. - 3·1운동은 한국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3·1운동 과정에서 우리 겨레를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1.. 2025. 6. 16.
독립기념관_2.3. 3관. 겨레의 함성1 # 독립기념관_2.2. 3관. 겨레의 함성1 # 겨레의 함성. #3010일제 식민지배 아래에서 일어난 우리 겨레의 1919년 3·1운동은 자유와 평화를 위한 외침이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외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국내를 넘어 국외 한인사회까지 울려 퍼졌다. 역사적 순간을 함께 했던 민중은 스스로 나라의 주인이자 독립운동의 주체임을 깨닫게 되었고, 3·1운동은 이후 대중투쟁과 같은 다양한 모습의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조국 독립은 물론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지향했던 3·1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민족통합과 세계평화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 존 II.-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을 일으키다.1.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힘을 모으다. # 국제정세 변화와 독립을 위한 노력. #3.. 2025. 6. 16.
2025_05_시립부산박물관_특별전 # 2025_05_시립부산박물관_특별전 # 박물관 미디어 아트를 만나다. # 양정웅- 전통의 재해석, 실감미디어로 구현하다. # 이이남- 고전 회화와 디지털의 융합, 영상화의 새로운 지평. # 왕사창의 산수도(山水圖) # 박연폭포(朴淵瀑布) # 김홍도(金弘道) 묵죽도(墨竹圖) ++++++++++++++++++++++++++ #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작품_새롭게 태어나다. 2025. 6. 3.
독립기념관_2.2. 2관. 겨레의 시련3-4 # 독립기념관_2.2. 2관. 겨레의 시련3-4 # 존 IV. 가혹한 식민 지배가 시작되다.4 # 침략 전쟁의 확대와 장기와에 따라 일제는 한국을 병참기지로 삼아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 수탈을 한층 강화하였다. 1938년 인력・물자‧자금을 총 동원하여 전쟁에 투입할 수 있도록 재정한 국가총동원법을 한국에서 적용하면서 자금 통제와 '공출' 명목의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일제는 원활한 수탈을 위해 '황국 신민화 정책'을 펼쳐 신사참배, 동방요배, 한국 신민서사 낭송・일본어 상용・창씨개명 등을 감행하고 징용・징병・공출 등 인적・물적 동원을 강요하였다. ◆ 좌: 조선사사엄 예방구금규칙◆ 우: 애국반 일기장 ◆ 좌: 앵국반 명패◆ 우: 협화회 회원장. ◆ 국민학교 통지표(通知表). ◆ 국민학교 초등공작(.. 2025. 5. 22.
독립기념관_2.2. 2관. 겨레의 시련3-3 # 독립기념관_2.2. 2관. 겨레의 시련3-3 # 존 IV. 가혹한 식민 지배가 시작되다.3 # - 1931년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침략 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을 확대하였다. 이로 인해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해지자 한국을 병참 기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 일환으로 일제는 '황국 신민화'를 내세우며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등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정책을 강행하였다. 이와 함께 놋수저와 쌀 등 물자를 공출하고, 한국인을 전쟁터와 공장·광산 등지로 강제 동원하였다. # 영문번역: 제목이 다르다.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일본은 침략 전쟁을 확대하고 한국을 인적·물적 자원 확보의 병참 기지로 삼았습니다. 일본은 한국인을 제국의 신민으로 만드는 정책을 실행했습니다.. 2025. 5. 22.
독립기념관_2.2. 2관. 겨레의 시련3-2 # 독립기념관_2.2. 2관. 겨레의 시련3-2 # 존 IV. 가혹한 식민 지배가 시작되다.2 # 민족분열통치 - 일제는 '문화통치'라는 미명 아래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변경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며 교육과 정치 참여 기회도 제한적으로 확대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거나 조선 총독부의 식민 지배에 비판적인 출판 물은 검열을 통해 정간·폐간했으며 교육을 통제하는 등 탄압과 감시는 더욱 교묘해졌다. 또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한편, 친일 세력을 양성 하여 민족을 분열시켰다. ◆ 동아일보 정간명령 사유서 및 무기 발행정지명령서 ◆ 창간호. ◆ 일제검열원고_현대인텔리켄챠론. ◆ 치안유지법제안토의 ◆ ◆ 국어.. 2025. 5. 22.
독립기념관_2.2. 2관. 겨레의 시련3-1 # 독립기념관_2.2. 2관. 겨레의 시련3-1 # 존 IV. 가혹한 식민 지배가 시작되다1 -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차별적이고 야만적인 식민 지배를 시작하였다. 일제의 식민 지배는 겉으로는 ‘동화同化’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철저한 민족 차별 정책으로 일관하였으며, 무력을 동원한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것이었다. 3・1 운동 이후에는 ‘문화 통치’라는 기만적인 정책으로 교묘하게 민족 분열을 획책하고 통제와 수탈을 강화하였다. 1930년대 들어 침략 전쟁을 확대한 일제는 민족 말살 정책을 본격화하였으며 한국을 병참 기지로 삼아 물자와 인력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 - 한국을 식민 지배하기 시작한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헌병 경찰을 중심으로 무단 통치를 펼쳤다. 헌병 경찰의 통제 아래 식민 지배.. 2025. 5. 21.
2025_04_국립경주박물관2_신라미술관 # 국립경주박물관2_신라미술관 - 특별전시관도 휴관 2025. 5. 9.
2025_04_국립경주박물관1_신라역사관 # 국립경주박물관1_신라역사관 - 경주박물관 정문 ◆ ◆ 성덕대왕신종_에밀레종- 비상천 무늬. # 월지관 휴관 알림- 동궐 관련하 자료를 찾기 위해 월지관을 왔으나 9월까지 휴관이다. # 신라 연표 ◆ 곡옥 曲玉 ◆ 쇠뿔모양 토기잔. ◆ 금장식 ◆ 금관 金冠 ◆ 장신구 ◆ 금귀걸이 ◆ 관 장식 # 천마총_정절을 이어가다. ◆ ◆ # 신라의 번영 ◆ 포항 중성리 신라비 # 금관가야를 병합하다. ◆ 임신서기석 ◆ 12지석상. ◆ 경주 명활산성비 ◆ ◆ ◆ 와당 瓦當 ◆ 석상 石像 ◆ 토우 土偶 ◆ 석상 石像 ◆ ◆ 토기 土器 ◆ 간돌칼 磨製石刀 2025. 5. 9.
독립기념관_2.2. 2관. 겨레의 시련2 독립기념관_2.2. 2관. 겨레의 시련2 # 나라를 빼앗기다. # 시련의 시작 #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 강화 단판도. # # 일로전쟁 사진화보. # 로바노프-아마카타 의정서. # 강제된 조약. # 을사늑약. # 한규설 관복. # 공고사控告詞 # 을사늑약문. # 김광제 상소문. # 민영환 유서. # 대한 이천만 동포에게 남기는 글. # 을사늑약 체결 장면. # 빼앗긴 권리. # 한일의정서 # 정미조약 丁未條約. # 기유각서己酉覺書 # # 동양철도선로략도 東洋鐵道線路略圖 # 경부철도선로약도 京釜鐵道線路略圖 # # 재정고문 용빙 계약안. # 한국시정 연보 # 경술년의 치욕. # 대한제국 최후의 1년. 2025. 5. 5.
독립기념관_2.2. 2관. 겨레의 시련1 # 독립기념관_2.2. 2관. 겨레의 시련1 # 북관대첩비 北關大捷碑 # 북관대첩비가 돌오오기까지.-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1592~1598) 때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字,1565~1624)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길주, 백탑교 등지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이끄는 왜병들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승전비이다. 그러나 정문부 선생의 업적은 선생을 모함한 무리에 의해 가려지고, 오히려 선생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돌아가셨다.선생이 돌아가신 지 43년 후에야 모든 것이 밝혀지고, 선생이 돌아가신 지 85년 뒤인 1708년에는 그곳에 부임했던 함경도 북평사(北評事) 최창대(崔昌大, 1669~1720)가 글을 짓고 이명필(李明弼)이 글을 써서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臨溟)에 .. 2025. 5. 5.
독립기념관_2.1. 1관. 겨레의 뿌리 # 독립기념관_2.1. 1관. 겨레의 뿌리 # 존 I. 우리 겨레의 터전과 뿌리우리 겨례의 터전과 뿌리 동북아시아 중앙에 위치한 한반도는 수천 년 동안 우리 겨레의 터전이 되었고, 우리 겨레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우리 겨레는 북방계 유목 민족과 남방계 농경 민족이 정착하여 형성되었고, 만주 지역과 한반도에 고대국가를 이루며 독자적이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 민족의 기원 # 주먹도끼- 구석기 연천 전곡리- 서울대학교박물관 제공 # 고인돌 왕국 # 천전리川前里 바위 그림 巖刻畵- 선사시대의 인류는 자신들의 생활상과 소망을 바위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천전리 바위그림에는 동심원, 마름모 등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는 풍요를.. 2025. 5. 5.
독립기념관_0.2.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 독립기념관_0.2.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 사실 작년에 이름만 보고 가지 못해 매우 안타가웠던 곳이다. 과연 어떻게 전시가 되었있는지 궁금했었다.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것이 내 생각과는 달랐다. 뭐랄까? 폐허가 된 그리스신전 느낌. 캄보디아 앙코르유적의 일부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이 공원을 보면서 느꼈던 아쉬움은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에 있는 이유를, 저 유물?을 보고 후세, 후대가 어떤 느낌을 받을지를 알고 설치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개인적으로, 차라리 광화문사거리에 두었으면 어떻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한 때의 번영이 결국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을 알기에.... #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가는 길 오른쪽에 있다. # 독립기념관 .. 2025. 5. 5.
독립기념관_0.1. 광개토대왕비 # 독립기념관_0.1. 광개토대왕비 - 겨례의탑을 지나 오른쪽에 있다. #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이 비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릉비와 같은 석질, 형태 글씨로 제작된 것이다. 높이 6.39미터에 무게 38톤에 이르는 이 비는 동양에서 가장 크고 높다. 4면에 새겨진 1,802자의 비문은 고구려의 건국사실과 왕위계승, 광개토대왕의 정벌활동, 그리고 왕릉을 지키는 제도와 대왕의 유훈이 담겨 있어서, 한국 고대 고구려의 웅장한 역사를 알려주는 증표(證票)이기도 하다.이 비가 있는 현장을 직접 찾아보기도 어렵고, 이 비를 둘러싸고 주변국들이 역사왜곡을 벌이기도 하여 우리에게 커다란 우려를 주고 있다.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 마당에 광개토대왕릉비(再現碑)를 다.. 2025. 5. 5.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6_2층_13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6_2층_13 # 가야 전사의 상징, 갑옷과 투구"방탄복과 헬멧을 착용하고 전투에 나가다"갑옷은 전투할 때 칼이나 화살을 맞지 않도록 몸을 보호해 주는 옷이다. 처음에는 가죽이나 나무로 만들다가 쇠를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철 갑옷도 만들었다. 갑옷은 철판 형태에 따라 판갑옷과 비늘갑옷으로 나뉘는데, 철판을 연결할 때는 못이나 가죽끈을 이용했다.방어 기능이 뛰어나고 몸에 딱 맞는 갑옷을 만들려면 최고의 기술이 필요했다. 갑옷에는 장식도 했는데, 새나 고사리무늬로 장식된 갑옷은 주로 영남 지역에서 확인된다. 지금 남아 있는 갑옷의 무게는 4~5kg 정도이지만, 쇠가 녹슬기 전에는 더 무거웠을 것이다.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는 세로로 길게 자른 철판을 가죽끈이나 못으로 연결해 만.. 2025. 2. 25.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5_2층_12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5_2층_12 # 철의 왕국 "가야" 철은 청동보다 단단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어 실용적이다. 평안북도 위원군 용연동의 초기 철기 시대 유적에서 중국 연나라(기원전 323~기원전 222) 화폐인 명도전과 철로 만든 물건이 함께 나와 이 시기에 철기 문화가 한반도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가야의 성장 기반은 '철'이었습니다. 고대 사회는 철이 널리 쓰이면서 사회가 변화 하고 발전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생산한 철은 화폐 처럼 쓰였으며, 낙랑과 대방, 왜(일본)에 수출되기도 했다. 가야 유적에서 나오는 덩이쇠는 크기나 모양이 일정해 물건을 사고팔 때 돈처럼 쓰일 정도로 해상 교역의 중요한 물품이었다.    #  말도 용맹한 전사이다."용감한 군인으로서.. 2025. 2. 24.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4_2층_11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4_2층_11 # 영혼을 위로하는 음식 "진지한 제물로 영혼을 달래다"무덤에 껴묻은 물건들은 가야의 다양한 문화를 보여 줍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다양한 모양의 토기는 죽은 사람을 기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토기에는 제사음식도 넉넉하게 담았을 텐데, 굽다리접시나 항아리에 남아 있는 곡물‧씨앗‧동물 뼈 등으로 당시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 니다. 즉, 가야의 먹거리는 물론 음식에 담긴 의미,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를 추정하는 단서가 됩니다.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제사상에 올리는 마음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 1.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_유개고배 有蓋高杯- 5세기- 함안 도항리(道項里)  ◆ 2. 긴목 항아리 바리모양 그릇 받침. 장경호長頸壺 발.. 2025. 2. 22.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3_2층_10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3_2층_10 # 따로 또 같이 한 나라로 합쳐지지 않았던 가야는 각기 자율과 공존이라는 특유한 문화를 만들었다. 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토기이다. 가야사람들은 지역별로 개성이 뚜렷한 토기를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 썼다. 굽다리접시‧긴목 항아리‧그릇받침‧뚜껑접시 등은 여러 가야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토기이다.그중 굽다리접시는 금관가야에서는 입이 바깥으로 벌어진 모양, 아라가야에서는 불꽃무늬 구멍으로 장식한 모양, 소 가야에서는 세모난 구멍을 낸 모양으로 저마다 개성을 드러낸다.   # 금관가야의 토기   ◆ 뚜껑 있는 굽다리 항아리1. 김해 양동리  2. 부산 복천동 3. 김해 망덕리  ◆ 넓은입 단지 / 그릇받침4. 김해 양동리 5. 창원 도계동  6.. 2025. 2. 21.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2_2층_9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2_2층_9 # 유물 진열 위치 및 이름 - 4~6세기   ◆ 손잡이잔_파수부배(把手附杯)1. 김해 윗덕정      2. 밀양 월산리3. 함양 몊정리      4. 함안 도항리5. 창원 대평리      6. 함안 황사리7. 밀양 귀명리      8. 김해 화정9. 합천 옥천         10. 창원 도계동11.울산 조일리     12.함안 오곡리13.밀양 신안        14.김해 대성동15.창원 현동        16.함안 윤외리(輪外里)17.김해 유하동 ◆ 잔(盞)18. 밀양 신안        19. 함안 황사리20. 밀양 귀명리    21. 창원 도계동(道溪洞)22. 창원 합성동(合城洞) ◆ 작은 그릇받침_소형기대(小形器臺)23. 함안 말이산    24. 고령 지산동.. 2025. 2. 20.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1_2층_8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1_2층_8 # 형태도 무늬도 가지각색 "다양한 형태와 패턴"굽다리접시는 중국에서는 '두'라고 하며, 제사 그릇으로 많이 쓰였다. 얕은 접시가 긴 굽다리 위에 붙은 모습으로, 가야 토기 중 가장 많이 발견된다. 굽다리접시는 굽구멍 모양 이나 무늬에 따라 가야 어느 지역에서 쓰였던 토기인지 알 수 있다.가야의 잔은 모양이 다양한데, 오늘날의 컵과 비슷해 '컵 모양 토기'라고도 한다. 보통둥근통 모양잔에 큰 손잡이가 붙어 있다. 굽다리잔은 굽다리 위에 입구가 넓은 잔을 붙이고, 굽다리에서 잔까지 이어지는 큰 손잡이를 달았다. 굽다리에 점토판을 붙이거나 작은 항아리 모양의 잔에 굽다리를 단 것도 있다.    # 글과 기호를 사용하다."가야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와 상징"종이를 발명.. 2025. 2. 18.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0_2층_7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20_2층_7 # 눈으로 한 번 귀로 또 한 번"도자기를 관찰하고, 듣고, 체험하다"잔 아랫부분에 흙구슬[흙으로 만든 방울알]이 들어 있어서 방울 잔이라고 한다. 먼저 구운 흙구슬을 넣어 잔을 만든 후 구웠다. 흔들 때마다 들리는 청아한 소리에 절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을까? 방울잔은 단순히 음료를 담아마시는 용도보다는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맛을 즐기는 용도로 보인다. 또한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쓰는 방울처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소리로 귀신을 쫓을 때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리와 맛을 함께 즐긴 가야인의 멋이 느껴지진다.이 딸랑이 컵은 바닥에 점토 공이 들어 있는 부분이 있다. 점토 공은 먼저 구워진 다음 나중에 구워진 그릇에 삽입되었다. 딸랑이의 점토 종에서 나는 맑.. 2025. 2. 16.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9_2층_6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9_2층_6 # "흐르는 듯 우아한 곡선의 아름다움" 가야 토기는 단단한 도질 토기와 무른 연질 토기로 나뉜다. 도질 토기는 깊은 굴 형태의 가마에서 1,000℃ 이상의 높은 온도로 구워 매우 단단한 회청색 토기로, 저장·의례·장식용으로 많이 쓰였다. 연질 토기는 얕은 구덩이 형태의 한뎃가마에서 낮은 온도로 구워 흡수성이 뛰어나고 무른 편이며 붉은색을 띠는 토기로,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였다.가야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도질 토기는 가야산 남쪽의 경상남도 일대와 호남 동쪽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그 생김새나 무늬가 매우 다양하다. 가야 각 나라에서 만든 토기는 모양은 다르 지만 한결같이 흐르는 듯 우아한 곡선이 아름답다. 가야 토기를 만드는 기술은 일본의 고대 토기인 스에키가 만.. 2025. 2. 15.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8_2층_5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8_2층_5 # 삶의 궤적, 조개더미 "조개더미를 통해 본 가야 사람들의 삶"2005년 발굴된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는 100개 층으로 구분 되며, 4단계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아래층인 100층에서는 기원 전후 무렵의 토기가, 맨 위층에서는 4세기 무렵의 단단한 토기[도질 토기]가 나왔다. 이는 이 조개 더미가 400여 년 동안 만들어졌음을 말해 준다. 조개더미 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온 토기, 뼈로 만든 도구나 장신구 970점, 점을 칠 때 쓰는 뼈 도구 101점, 동물 뼈 5,065점, 조개 껍데기 40종, 옥구슬과 철로 만든 물건들, 석기, 송풍관 등이 나와 당시 생활 모습이나 교류했던 지역도 추적할 수 있다.    #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발견된 유물. 1층.. 2025. 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