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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박물관/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_2.3. 3관. 겨레의 함성2

by isanjo 2025. 6. 16.

# 독립기념관_2.3. 3관. 겨레의 함성2

 

# 다양한 독립운동의 주체로 우뚝 서다.

 

- 우리 겨레 스스로 이루어낸 3·1운동은 역사의 거대한 분수령이 되었다. 3·1운동 과정에서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공화정 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3·1운동으로 1920년대 이후 노동 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 등이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여성, 노동자, 농민, 천민,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의 저변이 확대되어 다양한 계층이 대중투쟁을 이끌었다. 3·1운동을 분수령으로 하여 민중은 독립운동의 주체로서 우뚝 설 수 있었다.

 

 

# 3 ·1운동이 새롭게 쓴 독립운동의 역사. #3210.

 

- 3·1운동은 한국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3·1운동 과정에서 우리 겨레를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3·1운동을 전후해 국내외에서 추진된 임시정부 수립운동은 1919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독립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갖게 된 만주 독립군들은 본격적인 무장 독립투쟁 준비에 나섰다. 국내에서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 여러 사상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각계각층의 민중이 대중투쟁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 하나 된 우리를 꿈꾸며. #3220.

 

- 3·1운동 이후 학생층은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성장하였다. 1920년대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독립 운동은 학생들이 3·1운동과 같이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 역사적 사건이다. 신간회 활동은 당파 초월, 다른 계열단체와 연합, 전민족적인 운동을 지향하고 있어 민족통합의 3·1정신과 맞닿는다

 

 

  < 광주학생사건파급 학교분포도> 光州 國際生事件波及 學校分布圖 #3235.
- 광주학생독립운동 피해학교 분포 보고서
<1930년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 1930년 일제가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 학교들을 탄압하기 위해 작성한 지도 이다. 총 374개 학교를 조사하였으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시작한 광주공립 고등보통학교, 광주공립농업학교, 광주 공립사범학교 등도 포함되어 있다.

 

 

 

◆ 광주학생운동 비밀결사 계통도 #3241.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연루된 비밀결사 조직에 대한 보고서

< 1929년 | 독립기념관 소장>

일제가 광주와 서울의 학생 비밀결사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이다. 광주 성진회, 독서회를 비롯해 서울 청년동맹, 학생과학연구회 등을 조사한 기록으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과정도 정리해 놓았다.

 

김상환 옥중엽서 # 3238
김상환이 수감 중 쓴 엽서
<1930. | 독립기념관 소장(김주현 기증)>


- 광주학생 독서회를 조직하고 광주학생독립 운동을 주도한 김상환金相煥의 옥중 엽서이다. 가족의 안부를 걱정하며 '공판에 못오시더라도 괜찮다'고 당부하고 있어 1930년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릴 공판을 앞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중외일보 호외 #3240. 

< 1930.1.15 | 독립기념관 소장(김영환 기증) >

- 정외일보 추가호

- 1930년 1월 15일자 중외일보 호외이다. 기사에는 서울 실천여학교·상업여학교 ㆍ동덕여학교·배화여학교·휘문고 학생 들이 만세시위를 벌이다 해산·검거되었다 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를 통해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석천 수형기록표 #3239.
장석천 수감자 카드
<1932.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 항일 운동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장석천의 수형기록표입니다. 광주독립운동을 후원한 장석천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하는 학생투쟁 지도본부를 결성했습니다

 

  이두 석 태극기

<독립기념관 소장_유봉양 기증>

 

-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연대시위에 참여했던 이두석(李斗錫)이 소장했던 태극기이다. 이두석은 서울 중동중학교 재학 중 시이에 참여하여 경찰에 검거, 강제 퇴교당했다.


 

# 610만세운동 #3221

- 1926년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을 계승하고 완전독립을 목표로 한독립 운동이었다. 순종의 장례식 날인 6월 10일, 상여가 종로 단성사 앞을 지날 때 '독립만세' 함성 소리와 함께 격문 천여 장이 뿌려졌다. 천도교와 학생 단체, 조선공산당의 연합으로 시작된 6·10만세운동은 삼엄한 일제의 감시와 통제로 3·1운동처럼 전국으로 번지지는 못하였으나 다시 한번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 권오설 수형기록카드

<19283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 6·10만세운동을 추진했던 권오설의 수형기록카드이다. 권오설은 6·10투쟁특별위원회를 조직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한 인물로 1926년 6월 7일 일제에 체포되어 1930년에 옥사하였다.

 

 

 

 홍종현 수형기록카드

<1940.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6·10만세운동에 참가했던 홍종현의 수형기록카드이다. 홍종현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상여 앞에서 혈서를 쓴 깃발을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던 인물이다.  

 

 

◆ 홍종현 판결문

<1936.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 6·10만세운동에 참가했던 홍종현의 판결문이다.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6·10만세운동 판결문

<1927. / 독립기념관 소장(이원정 제공)>

 

- 6·10만세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판결문이다. 이 중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만세시위에 참여한 유면희에 대한 재판기록도 남아 있다.

 

◆ 조선전국민중감(朝鮮全國民衆鑑)

<1926.7. / 독립기념관 소장(김덕상 제공)>

 

- 1926년 중국 노동조합인 베이징 총공회에서 한국인들에게 보낸 서한이다. 한국의 독립투쟁은 전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으며, 6·10만세운동을 예로 들며 한국인의 역량에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이다.

 

◆ <신간회 강령과 규약>

<1927. / 독립기념관 소장(장세희 기증)>

 

-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1927년 조직된 신각회 관련 문서이다. '단결을 공고히 하고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는 강령을 통해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민족단결을 추구한 단체임을 알 수 있다.

 

 

◆ 중외일보(中外日報) 호외

<1930./ 독립기념관 소장(김영환 기증)>

 

- 1930년 1월 17일자 중외일보 호외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한 신간회 회원을 중심으로 20여 명의 청년을 검거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 <신간회 도쿄지회 성명서>

<1928.4. / 독립기념관 소장(강덕상 제공)>

 

- 일본의 노동자 농민당, 일본 노동 조합평의회, 일본무산청년동맹이 해산되자, 신간회 도쿄지회에서 발표한 성명서이다. 이를 통해 신간회가 노동자, 농민을 위한 투쟁에 적극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 <신간회 국내 정세보고서>

<3927. / 권대용 소장>

 

- 1927년 신간회에서 발표한 국내 정세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신간회 창립을 독립운동의 일대 전환으로 평가하고 민족이 비로소 총 역량을 모으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 <간회 안동지회 기부 영수증>

<1929. / 겸영조 소장>

 

- 신간회 안동지회 재정부 총무간사인 김상호에게 발행된 영수증읻. 신간회 회원이었던 김상호가 1929년 2월에 52원, 3월에 1월을 기부했음을 알 수 있다.

 

# 신간회 #3228.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계열의 통합 움직임은 1920년대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이어졌다. 1927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손을 잡고 당파를 초월한 신간회를 조직하였다.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는 강령으로 타협적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완전독립을 목표로 하였다. 신간회는 광주학생독립 운동·원산노동총파업과 같은 학생·노동운동을 지원하고 민중대회운동, 야학운동 등을 주도하여 일제 강점기 최대 항일사회운동 단체로서 활동하였다.

 

# 소년운동

- 어린이를 존대하라.

 

# 노동운동

- 일치단결하여 최후까지 싸우자.

 

# 검문검색 당하는 학생들 #3234.
<광주학생독립운동 공판>

- 3·1운동 이후 '동맹휴교' 등의 방법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펼친 학생층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통해 전민족적인 독립운동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은 1929년 10월 전남 나주역에서 일어난 한·일 학생들 간의 충돌이었는데 그간 쌓여왔던 학생들 사이의 반일 감정이 표출된 것이다. 1930년 3월까지 이어진 광주학생독립운동에는 국내외 280여개 학교, 5만 4천 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1920년대 대표적인 독립운동으로 식민지 교육타도와 독립을 주장하였다.

 

# 여성운동

- 여성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할 것이다.

 

# 민족문화수호운동  #3280

- 3·1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통치'라는 미명 아래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구역화하고 문화와 정신을 말살해야 했습니다. 민족문화수호운동은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따라 우리의 글·역사·문화 등을 보호하는 독립운동입니다. 한글학자 주시경의 정신을 진전시킨 조선어학회가 조직되어 일본어를 '국어'로 제정한 일제 식민동화 정책에 맞섰습니다. 그리고 일제 식민사학에 대응하고자 박은식·신채호가 중심이 되어 민족사학 발전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것은 35년 일제 지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전통과 정신을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 한글이 목숨 역사는 정

 

 

◆ 『조선사연구초朝鮮史研究艸』  #3284.

한국사 탐구 연구(조선사 연구초)
<1929. | 독립기념관 소장(광복회 기증)>

- 신채호申采浩가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던 6편의 조선사 논문을 묶어서 발행한 책이다.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고려 중기에 발발한 묘청妙淸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으로 평가하였다.

 

 

『한국통사韓國痛史』#3283
한국의 아픈 역사(한국통사)

<1917. | 독립기념관 소장(하와이대한인국민회 기증)>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朴殷植 이 저술한 역사서이다. 박은식은 '역사는 정신'이므로 민족정신을 지키면 결국 독립을 이룰 수 있음을 피력하였다.

 

 

◆ <현금 조선문전(現今 朝鮮文典)>

<1928 / 한글학회 소장>

 

- 주시경의 제자인 이규영(李奎榮)이 편찬한 초금용 기초 문법책이다. 한글과 한자, 품사, 문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당시 널리 활용되었다.

 

 

# 31정신, 메아리가 되어 영원히 울려 퍼지다. #3310.

 

# <공약삼장>

첫째,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인도와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 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 르지 말라.
둘째,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정당하게 발표하라.
셋째,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며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 <31독립선언서(보성사판)

<1919년. 3.1 / 독립기념관 소장(김선량 기증)_국가지정기록물 제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