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02_오사카성
# 남쪽 바깥쪽 해자.
# 옥조구(玉造口)_타마츠쿠리구치 다마조 구치
오사카성의 동남 출입구에 해당한다. 여기에 세워진 다마조몬(玉造門)의 안쪽에는 에도시대에는 大手口(오오테구치)나 京橋口(쿄바시구치)]와 같이 같은 돌담으로 만들어졌다. 그 위에 망루(多聞櫓:타몬야구라)가 세워졌다. 타몬다구는 게이오 (慶應)4년(=메이지(明治) 원년, 1868), 메이지 유신 때 큰 화재로 소실되어 그 후 오사카성을 관할하에 둔 육군의 손에 의해 승형(枡形)이 철거되었다. 타고 남은 다마조몬(玉造問) 옥조문도 철거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문 양쪽의 석조 이외에는 옛날 모습을 볼 수 없다.
'玉造'의 지명은 고대까지 사카노보리, 고분시대에 구옥(句玉:마가타마)・관옥(管玉:쿠가타마) 등 장식용의 돌을 만든 기술자 집단인 옥조부(玉造部:다마츠쿠리베)가 이 남쪽에 살고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 남문에서 외부에서 바라본 오사카성.
# 다마쯔꾸리구찌 죠반 야시끼 아도(玉造口定番敷跡)
- 에도시대 여기에는 막부의 요직인 오사카 죠반(定番)에 취임한 다이묘의 저택이 있었다. 오사카 죠반은 정원 2명으로, 그 중 다마조구 죠반은 니노마루타마 조구(二の丸玉造口)의 안쪽에 저택을 갖고 타마조구 경비 외에도 교바시구치반(京橋口定番)과 함께 성에 근무하는 하급 관리를 통솔한 오사카 성 수비의 통솔했다.
건물은 메이지 유신 대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유적에는 국군병원이 세워졌고, 메이지 10년(1877)에 일어난 서남전쟁에서는 전지에서 돌아온 많은 부상병이 수용되었다.
# 하얀 수선화.
# 구(舊) 제4사단사령부 청사.
# 오사카성 관람 안내문.
- 한글판도 있다.
#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대요시)과 오사카성.
# 9. 오사카성 축조.
# 풍신수길과 일본인
# 16. 조선 출병.
- 한국사람으로서 참 마음 아픈 장면이다.
모든 영주에게 조선침략의 명령을 내리고 나고야성까지 가서 지휘하였다.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은 비전투원을 포함한 대량 학살, 포로의 일본 강제 연행 등 조선 민중에게 큰 상처를 남겨주었다. 또한 필리핀, 대만, 오키나와에 사신을 파견하여 복속할 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 18. 다이고 꽃구경.
히데요시는 죽기 5개월 전에 교토 다이고지(醍醐寺)에서 가족을 비롯한 시녀들과 함께 성대한 꽃구경을 했다고 한다.
# 19. 임종.
# 현재의 오사카 지도.
# 옛날 오사카 지역 지도.
# 오사카성 여름 참전 무장의 깃발 문양.
# 오사카성 각인석(刻印石)
# 각인석(刻印石) 광장
- 여기쯤 왔을 때 비가 오는 바람에 밖으로 나갔다.
# 청옥문(靑屋門: 아오야몬)
아오야구치(靑屋口 )는 오사카성 니노마루(二の丸)의 북쪽에 위치한 출입구이다. 아오야몬은 그 승형(枡形:마스가타)의 안쪽에 세워졌다. 창건은 도쿠가와 막부에 의한 오사카성 재축 공사가 개시된 모토(元和)와 6년(1620)경으로 추정한다. 메이지 유신의 대화재로 피해를 입었다. 그 후 육군에 의해 개축되었지만 쇼와(昭和) 20년(1945)의 공습으로 다시 크게 파괴되었다. 쇼와 44년(1969), 오사카시가 잔재를 이용해 재건한 것이 현재의 문이다.
구조는 상부의 독립된 망루가 있다. 에도시대에는 상부의 망루 부분이 북서쪽의 이시가키(石垣沿)를 따라 오길게 뻗어 있었다. 승형(枡形)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사각형 구획으로 아오야구치의 승형(枡形)은 니노마루의 다른 출입구와 달리 외측으로 돌출하는 출승형(出枡形:데마스가타)로 되어 있다. 게다가 그 외측은 한때 해자가 있었고 다리가 걸쳐 있었다. 이 다리는 밀고 당길 수 있는 산반교(算盤橋:소루반바시)로 비상시 밖으로 끌어 당길 수 있었다. '아오야(靑屋)'라는 이름은 <일본의> 전국시대 이 지역 있던 오사카 석산(石山)의 혼간지(本願寺)의 사찰내 골목인 '아오야마치(靑屋町)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 오사카성 매실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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