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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베이징 중국국가박물관

2019_베이징 국가박물관 4층 북16_해대조종(海岱朝宗)1

by isanjo 2019. 8. 18.

2019_베이징 국가박물관 4층 북16_해대조종(海岱朝宗)1



# 산동성 고대문물 정수[菁華]

- 전시날짜가 2019.4.19~7.9까지이다. 운 좋게 7월 5일에 갔다.




# 직산한묘(稷山 漢墓)

- 직산(稷山)은 임치(臨淄)와 청주(靑州) 경계에 있는 산으로 稷下學官과 관련이 있다.
1983년 9월에 직산 정상 채석을 하기 위해 폭파를 하다가 한 대의 묘 1기를 발견하였다.
묘는 산 정상으로부터 수직으로 돌을 파서 만들었다. 깊이는 10m, 길이는 4m, 높이는 3.7m이다.
묘실은 폭파 후 부분 유물이 유실되고 70여건만 회수하였다. 유금 동기(鎏金銅器), 석경, 해란석(海卵石) 등 이 있었는데, 유금동기가 사람들의 이목을 가장 많이 끌었다.


◆ 발이 있는 기물 

- 기물의 윗부분은 직사각형으로 위에서 아래로 판 12개의 공간이 있다.





# 西漢 齊王

서한 왕조의 역사에서 도혜왕(悼惠王) 비(肥), 애왕(哀王) 양(襄), 문왕(文王) 칙(則), 효왕(孝王)려(將閭), 의왕(懿王) 수(壽), 여왕(厲王) 차창(次昌) , 회왕(懷王) 굉(閎) 7명이 한나라와 동인인 齊王이다.

기원전 201년 고조 유방이 친히 맏 서자인 劉肥를 제왕으로 봉하여 㬵東, 㬵西, 臨淄, 濟北, 博陽, 城陽 37개 현을 관할하게 하였고 여러 왕중에 최고라고 칭하였다.

기원전 164년 한 문제는 지역을 분할하여 여섯 개 나라로 만들었는데 劉肥의 아들인 將閭齊王이 되었다. 厲王 次昌이 후사가 끊어지자 한 무제는 자기의 차자인 을 제왕으로 삼았다. 기원전 110齊 懷王 閎이 세상을 떠나고 자식이 없자 서한은 다시는 齊王을 봉하지 않았다.

1978淄博市 臨淄區 大武鎭 窩托村 남쪽을 발굴하였는데, 墓主墓室은 아직 발굴하지 않았다. 5개의 陪葬坑에서는 禮器, 兵器, 儀仗器, 車馬器, 生活用具 등 부장품 1만 여건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 모양의 용무늬 청동 거울’, ‘유금청동 향로’, ‘유금 은쟁반’, ‘銀豆등은 모두 세상에 없는 진귀한 물건이다.

추측에 근거할 때 묘의 주인은 제2대 제왕인 劉襄일 가능성이 있다.



◆ 유금 청동 대문고리[鎏金靑銅鋪首]
- 서한 시기
- 淄博市 臨淄區 齊陵街道 梁家終村 稷山 漢墓 出土
- 齊文化博物院

* 문고리 윗쪽은 용무늬로 되어 있다.



◆ 풀잎 무늬 청동 거울[草葉紋靑銅鏡]
- 서한 시기
- 淄博市 臨淄區 齊化工有限公司 出土
- 齊文化博物院 소장


*이 거울 뒷면에는 "見日之光 長毋相忘"이라는 명문이 있다. 이것은 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한 거울이다.

한대의 동경은 귀족들이 얼굴을 보는 일상도구로 사용되었을 뿐만아니라, 청년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증표였다.

협서, 하남 등지의 한묘에서 발견된 동경의 한 유형에는 중에는 모두 "淸銀銅華以爲鏡 昭察衣服貫容貌 絲組雜環以爲信 淸光宜佳人"라는 내용이 있다.

이외에도 "見日之光 美人在旁", "長相思 世不絶 見朱顔 莫遠望", "常與君 相歡幸  毋相忘 莫遠望" 등의 문구가 있다.

한당 시기에는 매우 많은 동경이 있었다. 심지어는 혼인할 때 신물(信物)로도 사용되었는데,  명문의 내용은 "夫妻相守日月親", "亦成親 心與心 長毋相忘 俱死何傷 毋棄故而娶新" 등의 명문이 들어 있다.


# 위에 새긴 명문을 보면 기원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픈 마음은 똑같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본처를 버리고 새 여인을 얻지말라"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것같다.

거울이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재미있다. 이외에도 급제나 환갑등 기쁜 일을 기념할 때도 많이 주조하였다.




청동 순우(靑銅錞于)

- 서한 시기

- 淄博市 臨淄區 大武鎭 窩托村 齊王陪葬器物坑 出土
- 齊文化博物院 소장


* 순우는 군용 타악기의 일종으로 북과 화음을 맞추며 징과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순우는 약 100건 정도이다. 시기는 대부분 전국시대 중기 이후이며, 가장 빠른 것이 춘추시대 중기 전후로 추측할 수 있으며 순우의 유행과 분포 상황이 밝혀졌다.

산동반도는 순우의 중요한 원산지로 그 주인공은 동이(東夷)이다.

제왕묘 배장갱에서 출토된 청동악기는 겨우 순우,  용종(甬鐘) 각각 1건으로 이 유물은 무덤 주인의 신분과 묘장품의 수준이 전혀 맞지 않는다. 때문에 그 배후에 혹시 특수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앞으로 주요 묘실을 발굴하면 혹시 이러한 문제의 답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청동 술독[靑銅罍]

- 서한 시기

- 淄博市 臨淄區 大武鎭 窩托村 齊王陪葬器物坑 出土
- 齊文化博物院 소장


* 제왕묘 배장갱에서 함께 출토된 靑銅罍는 10건으로 모양이 일정하지 않으며 표면과 기물의 벽이 비교적 얇다.

뇌(罍)의 배 외벽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새김이 정교하지 않다.

명문의 내용은 "순우의 무게는 1균 6근 10량이고, 용량은 10두이다. 금아의 용량은 9두 5승", "口官右般", "下米", "大官北宮", "大官南曹", "齊大官畜粲人下米" 등이다. 이 것은 기물의 귀속처, 용도, 용량, 중량 등을 밝혀 놓은 것이다.



◆ 청동 호[靑銅壺]



◆ 방호(方壺)

- 주둥이 바깥쪽에 문자가 있다.




◆ 청동정(靑銅鼎)

- 주둥이 바깥쪽에 문자가 있다.

- 크기가매우 작다.






# 청동정(靑銅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