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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베이징 중국국가박물관

2019_베이징 국가박물관 4층 북16_해대조종(海岱朝宗)_# 산동 고대 유물3

by isanjo 2019. 8. 23.

2019_베이징 국가박물관 4층 북16_해대조종(海岱朝宗)


# 산동 고대 유물3


◆ 도문(陶文)

- 춘추 전국

- 징집

- 산동박물관 소장


- 도기를 만든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새겨서 관리자가 생산품을 감독하고 검사하기 편하게 하였다.

춘추 전국 시기 제나라 중심지역의 관(官)과 사(私)의 도업(陶業)이 조화롭게 발달하였다. 제나라 수도인 임치(臨淄)와 그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대량의 도문은 제나라 문화 특색 중 하나이다.

이에 비해 노(魯)나라의 고성과 그 주변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노나라 도문이 있는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발견된 동주시기의 와당 또한 매우 드물다.

제나라의 도문은 제나라의 지리, 직관 계통, 수공업 발정 상황, 문자 연혁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가지가 있다.





◆ "오왕 부차" 등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검[吳王夫差靑銅劍]

- 춘추 말기

- 1965년 산동 평도현 폐품수거소에서 징집

- 산동박물관 소장


- 오왕 부차 정권시기에 오나라는 한시대를 주름잡았다. "오왕부차"검은 춘추 말기 오나라가 오왕 부차의 명의(名義)를 주조한 동검은 주조기술의 정교함이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이 검에는 명문 "攻吾王夫差自作元用"이 주조되어 있다. 검의 몸에는 푸른 녹이 퍼져 있어 대대로 전해진 유물은 아니고 최근에 새로 출토된 기물로 보인다.

기원전 485년 오왕은 제나라 내란의 기회를 틈타 군대를 파견하여 바다를 통해 제나라로 잠입하여 제나라와 싸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최종적으로는 제나라가 승리하였는데 이 동검은 혹 제나라 사람이 빼앗은 전리품이다.





◆ 청동 양기(靑銅量器)

- 전국 시기

- 淄博市 臨淄區 鳳凰鎭 齊村 출토
- 齊文化博物館 소장


- 1991년 4월 이 두 양기를 교사 劉忠立이 임치고성박물관-지금의 제문화박물관-보내에 수장하게 되었다.

소개에 근거하면 이 두 청동 양기는 임치구 제가장촌(齊家庄村)에서 발견되었다. 동량(銅量:청동 되)은 교(窖:지하구덩이)에서 출토되었는데 이때 도관(陶罐), 발(鉢)도 있었고, 꽃무늬가 있는 지전(地磚), 판와(板瓦), 통와(筒瓦) 등 조각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전국시기의 유물이다.

조사에 근거하면 이것은 전국시기의 유지로 면적은 약 3000 평방미터로 동쪽의 임치 제나라 고성과는 약 5.5k이다.







◆ "절가기(節可忌)" 등의 명문이 주조된 청동 두(豆)[節可忌靑銅]

- 전국 초기

- 淄博市 臨淄區 敬仲鎭 白兔丘村 출토
- 齊文化博物館 소장


- 이 두(豆)은 내벽에는 명문 "唯王正九月辰在丁亥, 槩(節)可忌作厥元子仲姞媵錞"이 주조되어 있다.

명문의 내용으로 보면 이 것은 姞 성을 가진 귀족이 출가할 때 만든 결혼예물로 원래는 뚜껑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자는 기물을 만들 대표자의 국족명(國族名)으로 전문가들은 "郰" "節" 蔇" 등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다.

"元子"의 함의에 대해 전문가들은 長子, 首子, 嫡子 혹은 善子로 인식하고 있다. "可忌"는 마땅히 "何忌"로 읽어야 하는데 기물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다. 이 기물을 스스로 순(錞)이라고 명명하였는데, 바로 돈(敦)이다. 해당 유형의 기물은 당시 이곳에서는 '敦'이라고 칭하였으며 그 모양, 사용방식이 '敦'과 연원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徐子" 등의 명문이 주조된 청동 정(鼎)[徐子靑銅鼎]

- 전국 초기

- 淄沂市 費縣 南張庄 鄕台子沟村 출토
-
費縣 博物館 소장


- 이 정의 내부에는 명문 "余子汆之鼎, 百歲用之"이 새겨져 있다.

"余子"는 바로 "徐子"이다. 徐子汆은 서국의 國君으로 子는 작위이고  汆은 이름이다. 명문에 따르면 이 것은 서국의 기물이다.

이 정은 東蒙山 기슭에서 출토되었는데, 춘추 초기 서국의 세력이 비현 일대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齊叔姬" 등의 명문이 주조된 청동 반(盤)[齊叔姬靑銅盤]

- 춘추 초기

- 1959년 제남시 물자회수공사 폐구물자 창고에서 선별된 것이다.

- 濟南市 博物館 소장


- 이 청동 소반은, 모양은 장중하며 문식은 매우 아름답다. 이런 형태는 주나라 때 주나라 형식의 청동 소반의 전형이다. 소반의 안쪽 바닥에는 4행 22자의 명문 "齊叔姬作孟庚寶盤, 其萬年無疆, 子子孫孫永受大福用."이 주조되어 있다.

명문 속의 제 숙희(叔姬)는 집의 서열에서 셋째에 해당하는 제나라 희성 여자를 가리킨다. 제나라의 공족은 성이 강(姜)으로 대대로 노(魯)나라와 송(宋)나라 등 이성 국족(國族)과 통혼하였다. 이 여자는 제나라로 시집 온 다른 나라의 희성(姬姓) 귀족으로 보인다.   






◆ "宋右太師" 등의 명문이 주도된 청동정[宋右太師靑銅鼎]_뚜껑.

- 춘추 전국 시기

- 1986년 치박시 임치구 東夏庄 5號墓 출토

- 산동성 문물고고연구소 소장


- 이 정(鼎)은 뚜껑에  명문 *"宋右太師睪庖饙鼎"이 주조되어 있다. 역(睪)은 기물 주인의 이름일 것이다. 左師, 右師는 곧 송나라의 집정 대신이다. 이 정(鼎)은 곧 송나라 우사로 이름이 역(睪)인 사람의 주방용 기물이다.


해설에는  "포(庖)자의 자형이 반대로 쓰여 있고, 좌(左) 역시 우(右)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에 곧 우태사(右太師)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기물의 뚜껑에는 분명하게 두 글자 모두 '右'로 되어 있다.


춘추 전국시기 송나라는 오랜 기간동안 제나라, 초나라, 삼진(三晉) 등 여러 열강이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다. *송나라 양공(襄公)이 일찌기 제 환공(齊桓公)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제 효공(孝公)을 도와 송나라로 돌아가 즉위하게 하였다.


* 제 환공이 사망하자 왕자들의 다툼이 있었다. 이때 싸움에서 진 왕자 소가 송나라로 망명하여 송 양공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송 양공이 소를 도와 왕위에 앉히니 그가 바로 제 효공이다.


제나라와 송나라 사이에는 전쟁을 하기고 하고 평화롭게 지내기도 하며 장기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왕래하였다.

기원전 286년 제나라, 초나라, 위나라 삼국이 연합하여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이 기물은 송나라 대신 가족의 중요한 기물인데 전쟁이나 이사 등으로 인해 제나라의 중심지역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다.






◆ "陳樂君" 등의 명문이 있는 청동 시루[陳樂君靑銅甗]

- 춘추 중기

- 烟台市 海陽縣 嘴子前墓地 4號墓 출토

- 海陽縣 박물관 소장


- 嘴子前墓地는 지금까지 㬵東 지역에서 발견된 것 중 최대 등급, 최고 규모의 주대 귀족 묘지이다. 출토된 유품을 종류가 다양하고, 제작 품질이 우수한 수장 문물로 산동 지역의 동주시기 고대를 고찰살 수 있는 1차 중대한 발견이다.

 언증(甗甑)의 배부분 안쪽 벽에는  4행 17자의 명문 "陳樂君㰯作其旅甗, 用旂眉壽無疆, 永用之" 이 있다.

진(陳)과 우(虞)는 순임금의 후예로 성은 규(嬀)이다. 거주지는 지금의 하남 회양에 있다. 樂君의 '樂'자는 봉읍 이름이며, 투(㰯)는 陳樂君의 이름이다. 명문의 내용으로 볼 때 이 기물의 주인인 樂君은 회수 유역으로부터 온 진국의 귀족일 것이다.

  



◆ "聖" 자가 주조된 청동 우[聖靑銅盂]

- 춘추 중기

- 烟台市 海陽縣 嘴子前墓地 4號墓 출토

海陽縣 박물관 소장


- 이 청동 우(盂)는 체중이 비교적 크며 문식이 정치하고 아름답다. 주둥이 언저리에 1행 7자의 명문 "聖所獻爲下寢盂"이 새겨져 있다.

'성(聖)'자는 혹은 또는 족읍명(族邑名)이며, '하침(下寢)'은 궁궐[宮寢] 혹은 묘침(廟寢:재각(齋閣))이다. 명문의 내용은 聖이 바친 기물을 가지고 하침의 우(盂)로 썼다는 것이다. 聖이 바친 盂를 접수한 사람이 하침의 뒤에 두고 주둥이 언저리에 명문을 새겨 기념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