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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베이징 중국국가박물관

2019_베이징 국가박물관 4층 북16_해대조종(海岱朝宗)_산동 고대 유물4

by isanjo 2019. 8. 30.

2019_베이징 국가박물관 4층 북16_해대조종(海岱朝宗)


# 산동 고대 유물4


◆ "齊趫父"가 주조된 청동 력(鬲)[齊趫父靑銅鬲]

- 춘추 초기

- 山東省 臨朐縣 嵩山生態旅游區 泉頭村 출토

- 臨朐縣 박물관 소장


- 이 '력(鬲)'의 주동이 연저리에는 명문 "齊趫父作孟姬寶鬲, 子子孫孫永寶用享"이  주조되어 있다.

泉頭村의 甲墓에서 출토된 "齊侯子行"이 주조된 이(匜)가 있고,  乙墓에서 출토된 "齊趫父"이 주도된 '력(鬲)"이 있다. '趫'와 '行'은 글자의 뜻이 서로 같다. '趫父'는 字이고, '行'은 이름으로 두 가지가 가리키는 것은 동일한 한 사람이다.

이름으로 보면 이 사람은 어떤 자리에 있던 제후(齊侯)의 아들이다. '력'의 명문을 근거로 볼 때 이 기물은 趫父가 희(姬) 姓을 가진 아내 孟姬를 위해서 만든 기물로, 甲, 乙 두 묘는  제후(齊侯)의 아들 인 行이 그의 아내와 *다른 구덩이[]에 합장한 묘이다. 


* 봉문은 하나이고 관을 넣는 구덩이[]는 2개인 것이다. 




◆ "上曾太子般殷"의 명문이 주도된 靑銅鼎[上曾太子般殷靑銅鼎]

- 춘추 초기

- 山東省 臨朐縣 嵩山生態旅游區 泉頭村 출토

- 臨朐縣 박물관 소장


- 이 정(鼎)의 안쪽 벽에는 명문 "上曾大子般殷, 乃擇吉金, 自作肆彛, 心聖若慮, 哀哀利錐, 用孝용

享, 旣龢無測, 父母嘉持, 多用旨食 "이 주조되어 있다.

명문 중에 "上曾"은 학자들이 산동 경내의 夏나라 후예인 사(姒) 姓인 증국(鄫國)이라고도 하고, 豫南, 鄂北에 있던 희(姬) 姓인 증국(曾國)이라고도 인식하였다.

기물을 모양과 명문의 자형과 용어 습관으로 볼 때 희희(姬) 姓 증국(曾國)일 가능성이 크다.

명문에서 말한 "上曾"은 호북 隨縣의 증국상(曾國相)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그 나라의 국족(國族)의 땅은 응당 수현의 북쪽이나 서쪽 방향이었을 것이다. 해당 기물은 모두 혼인으로 인한 잉기(媵器:시집갈 때 가지고 가는 예물)가 아니기 때문에 전쟁으로 인한 침탈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 "尋仲"이 주조된 청동반[尋仲靑銅盤]

- 춘추 초기

- 山東省 臨朐縣 嵩山生態旅游區 泉頭村 출토

- 臨朐縣 박물관 소장


- 泉頭村 乙墓에서 출토 유물에는 尋仲盤과 尋仲匜가 있다.

尋仲盤의 안쪽 바닥에는 명문 "尋仲媵仲女子盤, 其萬年無疆, 子子孫孫永寶用"이 주조되어 있다.

어떤 학자는 '尋'은 鄩으로 읽어야 하니, 바로 하상(夏商) <후예의 성씨인>  사성(姒姓)인 옛날의 나라 斟鄩이라고 하였다.


 




◆ "國子"가 주조된 청동 호[國子靑銅壺]

- 전국 초기

- 淄博市 臨淄區 稷下街道 姚王村 출토

- 산동 박물관 소장


- 배 부분에 2개의 고리가 있다. 아마도 제호(提壺)인 듯하다.


"國子"가 주조된 청동 정[國子靑銅鼎]

- 전국 초기

- 淄博市 臨淄區 稷下街道 姚王村 출토

- 산동 박물관 소장


- 1956년 임치 徐姚鄕  姚王村 마을 사람이 자기 땅에 있는 봉황총(鳳凰塚)의 우물을 파다가 하 개의 동기를 발견하였다. 그 속에는 완전한 상태의 기물이 있었다. 鼎 7건, 豆 6건, 壺 건과 이외에도 1개의 簋 모양 기물의 파편과 기물의 다리 등이 있었으나 보수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해당 동기 중에는 동정(銅鼎)의 안쪽 벽에는 "國子" 2자가의 명문이 주조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國子의 묘라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國子"鼎의 소속이 國氏이니 이는 춘추 시기 제나라의 지위가 높은 세족(世族)이다. 요왕촌(姚王村)에서 출토된 8건의 "國子"鼎은 전국 시기의 국씨(國氏)가 상당히 높은 직급의 지위였음을 표명한 것이다.




◆ "國子"가 주조된 청동 두[國子靑銅豆]

- 전국 초기

- 淄博市 臨淄區 稷下街道 姚王村 출토

- 산동 박물관 소장


- 제나라의 國氏는 姜姓으로 노나라 숙손목(叔孫穆)의 아들이 국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는데, 그의 이름이 "國姜"인 것에서 증명할 수 있다. 국씨족의 종자(宗子)를 "國子"라고 칭한 것이다.

국씨(國氏)와 고씨(高氏)는 주왕조에서 명한 "守臣"에 속하므로 똑같이 제국 상경(齊國上卿)이 되었다.

<國語>와 <管子> 등의 문헌 기록에 의거하면 제나라는 관중(管仲)의 개혁 이후에 전국의 인구와 병력을 셋으로 나눠었는데 齊侯, 國子, 高子가 각각 그 중에 하나를 통솔하였으니 그 지위가 똑같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