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_베이징 국가박물관 4층 북16_해대조종(海岱朝宗)
# 산동 고대 유물5
◆ "高子" 명문이 주조된 청동 창[高子靑銅戈]
- 치박시 임치구 敬仲鎭 白兔丘村 출토
- 제문화박물관 소장
- 이 창의 당기는 부분 바깥쪽에 명문 "高子戈" 3자가 주조되어 있다.
제나라 고성 북쪽 褚家村과 敬仲鎭의 白兔丘村 일대에는 일찌기 '高子'戈, '節可忌'豆, 乳丁紋敦 등 진귀한 청동예기가 출토되었다.
문헌 기록에 의거하면 이 일대는 제나라 국족인 고씨(高氏)의 가족 묘지이다. 고씨는 대대로 제나라의 상경(上卿)을 지냈기 때문에, '高子'戈는 당연히 춘추 말기의 某位로 집정에 참여한 고씨의 병기이다.
◆ 용문늬 청동 창[龍紋靑銅戈]
- 춘추 중기
- 징집(徵集)
- 제문화박물관 소장
- 이 창의 진귀한 곳은 정면과 반대쪽 양면에 모두 6마리가 장식되어 있는데, 내부에 2개, 당기는 부분에 4개 있는데 각각의 용은 대략 'C'자형으로 모두 긴 입과 머리를 치들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 "公子土斧"가 새겨진 청동 호[公子土斧靑銅壺]
- 춘추 말기
- 산동성 朐縣 冶源鎭 楊善村 출토
- 산동 박물관 소장
- 이 호(壺)의 목 부분에는 명문 "公孫竈立(莅)事勢, 飯者月, 公子土斧作子中(仲)姜*(鐐/皿)之盤壺, 用旂眉壽萬年, 永保其身, 子子孫孫永保用之."가 새겨져 있다.
명문 중에 公孫竈는 곧 문헌에 기록된 제나라 경공(景公) 시대의 공손조로 또는 子雅이다. 공손조는 제 경공 3년(기원전 545년)에 경씨(慶氏)의 정변을 타도하는데 참여하여 이후 요직에 올라 집정하였다. 이후 제 경공 9년에 죽었는데 권력을 잡을 시간은 총 6년이었다. 이런 사실을 가지고 추측했을 때
"公子土斧"가 쓰여진 壺의 제작 연대는 또한 이 시기 안에 있을 것이다.
여러가지 현상은 제나라에서 출토된 제련호구(提鏈壺:뚜껑과 몸통의 고리를 쇠사슬로 연결된 호)는 는 수기이(水器匜)의 기능이 있어 반(盤)과 함게 사용한다. 이는 춘춘 전국 시기 제나라와 그 인근 지역의 일종 구역 문화의 특색이다.
◆ ??
- 참 특이한 모양이다. 지금 만들었어도 화려하고 세련된 작품이다.
뚜껑을 열어 당기면 휘어진 부분을 따라 뒤로 넘어 간다.
◆ 짐승 모양 손잡이 청동 두[獸柄靑銅豆]
- 전국 초기
- 치박시 임치구 淄江 花圓辛店 2號墓 출토
- 제문화박물관 소장
- 제조 형식이 기특하고 설계는 교묘하고, 주조는 정치하고 좋다.
◆ 청동 방두(靑銅方豆)_네모난 두
- 전국 초기
- 치박시 임치구 淄江 花圓辛店 2號墓 출토
- 제문화박물관 소장
- 이 두는 높은 자루에 낮고 평평한 소반이다. 소반 원 둥들면서 긴 방형이다.
이처럼 낮고 평평한 소반에 높은 배두(杯豆)는 제나라 청동기에서 보기 드물다. 이와 동일한 방식의 두(豆)는 중원지역에서는 자주볼 수 있다. 제나라의 이런 종류의 기물은 확실히 삼진(三晉) 등 중원 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이무기가 서려 있는 문양 청동 시루[蟠螭紋靑銅甗]
- 전국 초기
- 치박시 임치구 淄江 花圓辛店 2號墓 출토
- 제문화박물관 소장
- 이 언(甗)은 증(甑)과 력(鬲)으로 몸체가 나누어져 있다. 력(鬲)의 바닥 부분에 불을 땐 흔적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불을 때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辛店 2號에서 출토된 전국시기의 청동기는 중후하고 단정하며, 주조기술이 청치하며, 문식이 정밀하고 아름다우며, 조형이 우아한데, 이것은 제나라의 청동 주조기술의 비교적 높은 수준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제나라의 제련과 주조 공예에 대한 연구는 모두 중요한 가치가 있다.
◆ 뚜껑이 있는 청동 두[靑銅蓋豆]_1쌍
- 전국 초기
- 치박시 임치구 淄江 花圓辛店 2號墓 출토
- 제문화박물관 소장
- 춘추 말기가 시작하면서 청동 두(豆) 종류의 기물은 현저히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수량과 유형 모두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이것은 서주 시기 이래로 각지역의 두(豆) 종류 기물의 사용 전통과 직집적인 관련이 있다.
'뚜껑이이 있는 豆'는 춘추 말기에 최초로 출현하였다. 제나라의 이 유형과 같은 기물의 높은 자루는 연나라 형식의 豆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뚜겅 위의 3개 환뉴(環鈕:고리 인꼭지)는 전국 시기 중산국(中山國)의 豆와 동일한 것으로, 전국 중기 이후 뚜껑이 있는 두는 점차 각 제후국 특히 동방의 여러나라에서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이런 중요한 사실은 동주 시기 제나라와 주변 지역의 교류 정황을 반영한 것이다.
辛店 2號墓에서 출토된 '뚜껑이이 있는 豆' 4건은 형태, 크기가 모두 동일하며 함께 사용한 식기로 보인다. 그 중에 豆의 배부분 내부에는 흙갈색의 진흙 상태의 물질이 남아 있어, 탄화된 흑회색의 곡물이거나, 쌀모양의 낟알이 그릇 주둥에 삼베로 뚜껑을 닫은 흔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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