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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하남 안양 문자박물관

안양 문자박물관|명각묵어(銘刻墨語)1 전서(篆書)

by isanjo 2026. 5. 22.

# 안양 문자박물관| 명각묵어(銘刻墨語)1(2024)

특별전시관 1관

 

# 고대 중국 비명각탁편전1

 

# 머릿말

고인들은 “돌은 오래되고 두터우면, 천 년을 견딜 수 있다(磐石方且厚, 可以卒千年)”고 하였다. 돌은 견고하고 두터워, 천 년을 지나도 “썩지 않는(不朽)” 특성을 지니니, 인간 사회가 시간의 한계를 넘어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傳遠后世子孫者知之)” 바라는 불후의 추구와 서로 맞아떨어진다. 이로써 돌은 정보를 전하는 매개체가 되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명문(銘刻)과 묵적(墨跡)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자연 풍화와 인위적 훼손 아래에서, 한때 굳세고 무너지지 않으며 썩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던 돌도 마침내 잔결(殘缺)과 단락(斷裂)으로 변해 갔고, 명문과 묵적 또한 점차 흐릿하고 희미해졌다. 비석을 세운 사람들이 추구하던 “불후”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미 “썩음(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셈이니, 불후란 끝내 이루기 어려운 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시대는 변하여, 한때 길가에 버려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비석과 각석은 이제 시대 기억의 수호자이자 역사 서사의 비편(碑片)이 되었다. 그 안에 담긴 역사적 가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눈부신 빛을 발하게 되었다. 비석 각석의 가치 있는 정보를 복제·연구하기 위하여 탁본이 생겨났다. 탁본의 “가상적 재현(槧空出世)”은 점차 “썩어 가는” 비각(碑刻)으로 하여금 다시 새로운 가지를 뻗게 하였고, 전혀 새로운 생명을 열어 주었다. 이는 비석을 세운 사람들과 그들이 추구하였던 “불후”와도 다시금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古人云“磐石方且厚, 可以卒千年”。石頭堅硬牢固, 歷經千年而“不朽”的特質與人類社會想要跨越時空界限以“傳遠後世子孫者知之”的“不朽”追求相契合, 使其成爲一種傳遞信息的載體, 演變爲今天我們所見的銘刻墨跡。然而在自然風化剝蝕和人爲損害破壞下, 曾經以爲堅不可摧、不會腐壞的石頭已成爲殘碑斷碣, 銘刻墨跡也開始漫漶殘泐。立碑人追求的“不朽”從其誕生的那一刻也開始走向“朽”, 不朽已矣。

斗轉星移、歲月變換, 過去隨處可見、看似無甚價值的碑銘石刻, 如今蛻變成了時代記憶的守護者與歷史敍事的碑銘。它們內含的歷史價值, 隨着時間的推移, 逐漸綻放出耀眼的光芒。爲了複製和研究碑石刻價值的信息, 拓片應運而生。拓片的“槧空出世”使得逐漸變“朽”的碑刻又生長出新的枝丫, 開啓了全新的生命, 與立碑人及孜以求的“不朽”不謀而合。

 

# 제1차 고대명비명각 문물 목록

 

# 맺음말

“불후(不朽)”는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 사회가 시공의 한계를 넘어 추구해 온 변치 않는 이상으로서, 중화민족이 죽음·시간·자아의 관계를 어떻게 사유하고 탐구해 왔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사람의 수명은 때가 되면 다하고, 영화와 즐거움도 그 몸에서 그칠 뿐이다(年壽有時而盡, 榮樂止乎其身).” 불후란 우리가 부지런히 좇아 얻어내는 결과나 목표가 아니라, 존재해 가는 과정 그 자체이며, 땀을 흘리고 힘껏 분투하는 정신문화이기도 하다.

삶은 단 한 번뿐이다. 부디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한 번쯤 뜨겁고 치열하게 살아 보라!

 

“不朽”作爲從古至今人類社會跨越時空界限的不變追求, 記錄了中華民族對死亡、時間與自我關係的思考探索。“年壽有時而盡, 榮樂止乎其身”。不朽的重來都不是我們孜孜以求的結果或目標, 而是存在的過程本身, 更是揮灑汗水、努力拼搏的精神文化。

生命只有一次, 請爲自己“熱辣滾燙”一次!

 

# 후중고박(厚重古樸) 제1단원

- 전서(篆書)

전서(篆書)는 갑골문에서 발전해 나온 것으로, 서사 형식이 더욱 규범화되고 통일되었다. 진시황이 육국을 통일한 뒤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서동문(書同文)”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전서는 관방 문서의 주요 서사 방식이 되었다. 이 시기의 전서는 자형이 방정하고, 선조가 유창하며, 구조가 엄정하여 “진전(秦篆)” 또는 “소전(小篆)”이라 불렸고, 후세 전서의 전범이 되었다. 전서는 한대에 이르러 한층 더 발전하고 완성되었다. 한대의 전서는 자형이 더욱 정제되고, 선조는 더욱 원윤해졌으며, 구조 또한 더욱 안정되어 “한전(漢篆)”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하였다. 또한 한대 전서는 비각·묘지 등 여러 영역에 널리 사용되어, 서법 예술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 되었다.

 

篆書是從甲骨文演變而來, 書寫形式更加規範和統一。秦始皇統一六國後, 爲了加強中央集權, 推行“書同文”政策, 使得篆書成爲官方文書的主要書寫方式。這一時期的篆書, 字形方正, 線條流暢, 結構嚴謹, 被稱爲“秦篆”或“小篆”, 成爲了後世篆書的典範。篆書在漢代得到了進一步的發展和完善。漢代的篆書, 字形更加規整, 線條更加圓潤, 結構更加穩定, 形成了“漢篆”的獨特風格。同時, 漢代篆書還廣泛應用于碑刻、墓誌等領域, 成爲了書法藝術的重要組成部分。

 

◆ 원창비(袁敞碑) 탁본

 

 

◆ 정시석경(正始石經) 탁본

삼국 위(魏)·고문(古文)·전서(篆書)·예서(隸書)

또한 “삼체석경(三體石經)”이라고도 불린다. 석경에는 《상서(尚書)》·《시경(詩經)》과 일부 《좌전(左傳)》이 새겨져 있으며, 위나라 수도 낙양 남쪽의 태학(太學)에 세워졌다. 고문·전서·예서의 세 가지 서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 석경은 중국 서법사와 한자의 연변 발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三國魏·古文·篆書·隸書

又稱《三體石經》, 石經上刻《尚書》·《詩經》和部分《左傳》, 立于魏都洛陽南郊太學講堂西側。因經文文字用古文·篆書·隸書三種字體刻成而得名。該石經在中國書法史和漢字的演進發展史上具有非常重要的意義。


◆ 진역산각석(秦嶧山刻石) 탁본

- 秦나라 篆書

- 각석의 전반부는 진시황의 정의로운 전쟁과 통일된 중앙집권제 국가가 백성에게 가져다준 이점을 찬양하고 있다. 후반부는 이사가 진 이세를 수행하여 순행할 때 상서를 올려 진시황이 세운 각석 옆에 조서를 새기도록 요청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 서체는 운필이 굳세고 유창하며, 선이 원숙하고 부드럽다. 결구(글자의 구조)가 균형이 잡혀 있고 장법(글자의 배치)의 질서가 정연하여 리듬감 있는 율동감을 지니고 있다.

 


◆ 원안비(袁安碑) 탁본

- 漢나라 篆書

-《원안비》의 본명은 《한사도원안비》이며, 보기 드문 동한 시대의 전서 비석 각석이다. 비문에는 원안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는데, 글자의 파인 자국과 획의 날카로움이 마치 새것과 같. 서체는 중후하고 고풍스러우며 웅장하면서도 다채롭. 선이 섬세하고 부드럽게 꺾이며 체태가 힘차고 유창하. 대수롭지 않게 흐르는 듯한 원융함 속에서도 단정하고 네모 반듯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한대 전서의 전형적인 대표작으로 꼽힌.


◆ 곽허기묘지개(郭虛己墓志蓋) 탁본

* 지개(志蓋) 묘지명 뚜껑.

- 唐나라 · 해서楷書 *전서(篆書)의 오류로 보임.

곽허기 묘지명은 1997년 허난성 옌스(偃師)에서 출토되었다. 묘지명 덮개 윗면에 전서로 “당고공부상서증태자태사곽공묘지명( 唐故工部尙書贈太子太師郭公墓誌銘 )”이라고 새겨져 있다. 지문(본문)은 해서로 쓰였으며, 35행에 행당 34자씩 채워져 있어 총 1,150자이다. 이 묘지명은 서예 연구사에서 그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묘지명은 천보 8년(서기 749년)에 찬성되었는데, 당시 안진경의 나이는 41세였으며 그의 서예 예술은 이미 상당히 두터운 공력을 갖추고 있었다.

 

郭虛己墓誌1997年出土於河南省偃師。墓誌蓋頂篆書爲“唐故工部尙書贈太子太師郭公墓誌銘”。志文楷書,35行,滿行34字,共1150字。這一墓誌在書法研究史上的作用尤其重要,墓誌撰寫於天寶八年(公元749年),顏真卿當時是41歲,其書法藝術已有相當濃厚的功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