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_0819_공묘(孔廟)1
# 베이징_북경공묘 간략 소개 및 공묘 안내.
◆ 어제평정회강 소금역적예 고성태학비(御制平定回疆 剿擒逆賊裔 告成太學碑)
- 청나라 도광 9년(1829) 평정회강 어제 기공비(紀功碑)
*이 비석은 청나라 건륭제가 회강(지금의 신장 지역) 반란을 평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직접 글을 짓고 새기도록 명한 것이다. 비문에는 회강 반란을 평정한 과정과 승리의 성과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건륭제가 국가의 통일과 민족 단결에 얼마나 중점을 두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앞면.
뒷면
◆ 대성문(大成門)
◆ 선사공자행교상(先師孔子行敎像)
양청흠은 대중현(臺中縣) 사록진(沙鹿鎭) 출신의 실업가로 세계 양씨 종친회 이사장이다. 사업으로 성공한 뒤 뜻하지 않게 사회복지자선활동에 참여하였다. 자금을 휘척하여 학문에 도움을 주고 공묘에 찬조하여 공헌바 가 많다.
- 양청흠(楊淸欽)이 조각을 기증하였다.
수도박물관
1993년 3월.
◆ 공자가호비(孔子加號碑)_공자에게 존호를 추가한 것을 기념한 비석.
- 대덕 11년(1307)에 원나라 무종(武宗:성종)이 공자에게 특별히 조명(詔命)을 내려 " 대성지성문성완(大成至聖文宣王)"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원나라 순제(順帝:혜종) 지원 2년(1336)에 돌에 새기고 비를 세웠다.
*국자감의 지경문(持敬門) 을 통해 들어오면 왼쪽에 있다. 다른 비석과 달리 이 비석은 유리로 덥혀 있다.
# 비석 중앙에 대성지성문성완(大成至聖文宣王)"라고 보인다.
◆ 대성문 오른쪽에 석고 5기. 갑을병정무, 왼쪽에 기경신임계 5기가 있다. 오른쪽은 학생들 수십명이 모여서 설명을 듣고 있어 사진을 찍지도 못했다. 아예 벽에 붙어 있어서. 그나마 왼쪽에는 사람이 없어 사진을 찍었다. 왼쪽에는 석고 앞에 종이 있고, 오른쪽에는 북이 있다.
# S22.
# 벽에는 아래 석5개의 석고의 내용과 번역문이 함께 있다.
# 왼쪽부터 10.癸 9.壬, 8申, 7庚, 6己.
◆ 장조(張照)가 쓴 한유의 석고가(石鼓歌) 비석.
한유의 <석고가(石鼓歌)>
張生手持石鼓文 勸我試作石鼓歌.
장생이 손에 석고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한 번 석고가 지으라고 권하네.
少陵無人謫仙死 才薄將奈石鼓何.
소릉엔 사람 없고, 적선도 죽었으니, 재주 얕은 내가 장치 어찌 석고가를 짓겠는가.
周綱凌遲四海沸 宣王憤起揮天戈.
주나라 기강이 무너져 사해가 들끓으니, 선왕이 분발하여 하늘의 창 휘둘렀네.
大開明堂受朝賀 諸侯劍佩鳴相磨.
크게 명당 열고 조하를 받으니, 제후들의 칼과 패옥 서로 부딪쳐 울렸다오.
蒐於岐陽騁雄俊 萬里禽獸皆遮羅.
기산 남쪽에서 사냥하여 영웅과 준걸들 달리게 하니, 만리의 금수들 모두 길을 막아 그물로 잡았도다.
鐫功勒成告萬世 鑿石作鼓隳嵯峨.
공을 새기고 성과를 기록하여 만세에 알리려, 돌 깎아 북 모양 만드느라 높은 산 무너뜨렸네.
從臣才藝咸第一 揀選撰刻留山阿.
따르는 신하들 재예가 모두 제일인데, 선발하여 글 지어 새겨 산아에 남겼도다.
雨淋日炙野火燒 鬼物守護煩撝訶.
비에 젖고 햇볕 쬐고 들불에 타도, 鬼物이 수호하고 애써 물리쳐 꾸짖었네.
公從何處得紙本 毫髮盡備無差訛.
공께선 어디에서 탁본을 얻었는가, 털끝만큼도 틀림이 없이 모두 갖추었구나.
辭嚴義密讀難曉 字體不類隷與蝌.
文辭는 엄정하고 뜻은 정밀하여 읽어도 깨닫기 어렵고, 자체는 예서도, 과두문자도 닮지 않았네.
年深豈免有缺畫 快劍斫斷生蛟鼉.
세월이 깊었으니 빠진 획을 어찌 면할까만, 예리한 칼로 살아있는 교룡과 악어 잘라 놓은 듯.
鸞翔鳳翥衆仙下 珊瑚碧樹交枝柯.
난새와 봉황이 날아오르고 신선들이 내려오는 듯, 珊瑚와 碧樹 가지가 서로 얽혀 있는 듯.
金繩鐵索鎖紐壯 古鼎躍水龍騰梭.
금줄과 쇠사슬이 서로 얽혀 힘차고, 옛 솥이 물에서 뛰듯, 용이 북으로 변해 날아가듯.
陋儒編詩不收入 二雅褊迫無委蛇.
고루한 선비들이 시를 엮을 때 수록하지 않았으니, 〈大雅〉와 〈小雅〉는 편협하고 궁박하여 여유가 없네.
孔子西行不到秦 掎摭星宿遺羲娥.
공자는 서쪽에 갔지만 진나라에 이르지 않았으니, 별은 주워 모았으나 羲娥는 버려둔 셈이네.
嗟余好古生苦晚 對此涕淚雙滂沱.
아, 나, 옛것을 좋아하지만 늦게 태어나, 이것을 마주하여 두 줄기 눈물이 쏟아지누나.
憶昔初蒙博士徵 其年始改稱元和.
생각건대 처음으로 박사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해 처음으로 원화라 개칭했네.
故人從軍在右輔 爲我量度掘臼科.
친구가 從軍하며 右輔에 있으면서, 나를 위해 헤아려 구멍을 파두었네.
濯冠沐浴告祭酒 如此至寶存豈多.
冠 씻고 목욕하여 祭酒에게 아뢰기를, “이처럼 지극한 보물이 남아있는 것 어찌 많으리오
氈包席裹可立致 十鼓祇載數駱駝.
담요로 싸고 자리로 말면 즉시 가져올 수 있으니, 열 개의 石鼓는 몇 마리 낙타면 실어 올 수 있습니다
薦諸太廟比郜鼎 光價豈止百倍過.
태묘에 올려 郜鼎과 나란히 놓는다면, 광채와 가치가 어찌 백배에 그치리오.
聖恩若許留太學 諸生講解得切磋.
聖恩으로 태학에 보관하길 허락하신다면, 제생들은 강구하고 해석하여 학문을 갈고 닦을 수 있을 것입니다.
觀經鴻都尙填咽 坐見舉國來奔波.
石經을 관람하느라 홍도문도 메웠는데, 장차 온나라에서 물밀듯이 몰려드는 것 볼 것입니다.
剜苔剔蘚露節角 安置妥帖平不頗.
이끼를 깎아내고 도려내어 마디와 모서리 드러내고, 편안히 두고 평평히 하여 기울어지지 않게 하여,
大廈深簷與蓋覆 經歷久遠期無他.
큰 집에 깊은 처마로 덮고 가려준다면, 세월이 오래도록 지나도 별 탈 없을 것입니다.”
中朝大官老於事 詎肯感激徒媕婀.
조정의 대관들은 모든 일에 익숙할 터, 어찌 감격만하고 우물쭈물 하는가.
牧童敲火牛礪角 誰復著手爲摩挲.
목동들 부싯돌로 삼고 소는 뿔로 비벼대니, 누가 다시 손대어 어루만질까.
日銷月鑠就埋沒 六年西顧空吟哦.
나날이 없어지고 다달이 삭아 매몰되어가니, 육년 동안 서쪽을 바라보며 공연히 한숨 짓네.
羲之俗書趁姿媚 數紙尙可博白鵝.
왕희지의 속된 글씨 아름다운 모습에만 내달렸어도, 몇 장의 종이 오히려 흰 거위와 바꿀 수 있었는데,
繼周八代爭戰罷 無人收拾理則那.
주나라 이은 팔대에 전쟁이 끝났으나, 석고 돌보는 이 없으니 어이된 일인가.
方今太平日無事 柄用儒術崇丘軻.
지금은 태평시대라 아무일이 없으니, 儒學을 높여 쓰고 孔孟을 숭상하는 이때.
安能以此上論列 願借辯口如懸河.
어찌하면 이것을 논의에 부칠까, 원하노니, 현하와 같은 口辯을 빌었으면.
石鼓之歌止於此 嗚呼吾意其蹉跎.
석고의 노래 여기서 그치니, 안타깝다 나의 뜻 이뤄지지 않음이여.
◆ 비석 오른쪽 측면
方今太平日無事 柄任儒術崇孔轲 安能以此上論列 願借辩口如悬河 石鼓
之歌止於此 嗚呼吾意其蹉跎 張照
◆ 대성문 왼쪽 북 앞에 있는 비석. S22.
- 집석고문소유문성십장제고중각서(集石鼓文所有文成十章製鼓重刻序)
- 석고문을 번역한 사람은 왕걸(王杰), 팽원서(彭元瑞), 동고(董誥), 김사송(金士松), 심초(沈初) 등 5명이고, 교정자는 김간(金簡), 전서를 베껴 쓴 사람은 조병충(趙秉冲)이다. 각석을 감독한 사람 어서처(御書處:文書館) 6품 사고(司庫)인 성경(盛格)이며, 글자를 새긴 사람은 8품인 사장(司匠) 장수(長壽)이다.
◆ 진사제명비 방위 표시도
- 번호 설명판. 120~197번.
◆ 청대 진사제명비.
- 청대의 과거는 대체로 명나라를 모방하였다. 순치 3년(1646)부터 광서 30년(1906)년까지 모두 118기의 진사제명비가 공묘 원내에 세워져 있다. 유용(劉墉), 기윤(紀昀), 임칙서(林則徐), 옹동화(翁同龢), 강유위(康有爲)에서부터 양무파의 영수인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 역사적인 인물의 이름도 그 비석에 모두 새겨져 있다.
◆ 어제신건태학비(御製新建太學碑)
- 북경 공묘에는 유일하게 1개의 명대어비정(明代御碑亭)이 있다. 명나라 정통 9년(1444)에 서성전 앞 북쪽 한켠에 서워졌는데 청나라 건륭 황제 때 이곳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전조(前朝)의 어비는 녹색유리기와를 사용하여 지붕을 덮게 되었다.
◆ 청나라 유명 인사의 사진. 모두 10명이다.
# 원숭환(袁崇煥), 납란생덕(納蘭性德), 류용(劉墉), 기윤(紀昀)
# 정섭(鄭燮), 임칙서(林則徐), 옹동화(翁同龢)
# 심균유(沈鈞儒), 유춘림(劉春霖), 채원배(蔡元培) 등의 소개가 있다.
맺음말.
# 수리한 비석.
◆ 감(鑑) -방화수통.
◆ 청대진사제명비 표지판. 설명은 위와 동일하다.
◆ 대성문(大成門) 현판.
# 대성전 현판.
◆
◆ 어제 중정예제문묘시(御製 仲丁詣祭文廟詩)
◆ 어제 중정예제문묘시(御製 仲丁詣祭文廟詩)_윤진(胤禛)이 짓고 옹정 황제가 썼다.
- 청나라 옹정 6년(1728) 2월<16일>에 황제가 직접 공묘로 와서 공자의 제사를 제내고 공자를 찬송하는 비에 제자를 지냈다. 청대에 공묘에 지내는 제사는 일반적으로 매년 음력 봄 2월과 8월, 즉 이른바 '상정제공(上丁祭孔)'이다.
◆ <어제 중정예제문묘시(御製 仲丁詣祭文廟詩) >
扶植綱常百代陳 강상을 세우는 일은 백대에 걸쳐 이어져야 하는데,
天將夫子覺斯民 하늘은 공자를 보내 백성을 깨우쳤네.
帝王師法成隆治 제왕은 그의 가르침을 본받아 훌륭한 치세를 이루고,
兆庶遵由臻至淳 백성은 그를 따라 순박함에 이르렀네.
道統常垂今與古 도통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이어지고,
文明共仰聖而神 문명은 성현을 공경하며 신과 같이 우러렀네.
功能溯自生民後 공능은 민중이 생겨난 이후부터 거슬러 올라가니,
地辟天開第一人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첫 번째 사람이라네.
# s22.
◆ 어제 중수문묘비기(御製 重修文廟碑記)
- 청나라 건륭 34년(1769) 공묘의 중수를 마친 일을 기록한 비.
◆ 어제 문묘역개황와(御製 文廟易蓋黃瓦 臨雍紀事碑)_문묘의 기와를 황색으로 바꾸고 국자감을 들른 사실을 기록한 비.
- 청나라 건륭 4년(1739) 대성전, 대상문의 기와를 황색으로 바꾼 일을 기록한 비이다.
◆ 어제 평정준갈이 고성태학비(御製 平定准噶爾 告成太學碑)
- 청나라 건륭 20년(1755) 사막 서쪽의 몽고족인 준갈이부(准噶爾部)를 평정하고 어제 기공비(紀功碑)이다.
◆ 어제평정양금천 고성태학비(御製平定兩金川 告成太學碑)
- 청나라 건륭 41년(1776) 대금천(大金川), 소금천(小金川)을 평정한 어제 기공비(紀功碑)이다.
◆ 어제평정청해 고성태학비(御製平定靑海 告成太學碑)
- 청나라 옹정 3년(1725)에 청해를 평정한 어제 기공비이다.
◆ 요로(燎爐)
- 전전(前殿)의 서배전(西配殿)에 제사용으로 올린 폐백(弊帛: 비단 예물)을 불태우기 위해 광택이 없는 벽돌로 만든 구조물.
'요옥(燎屋)' 또는 '분백로(焚帛爐)'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공묘에 제사를 지낼 때 축판, 비단, 공물 등을 태우는데 사용하였다.
◆ 대성전(大成殿)
- 공묘의 중심 건축물로 건물의 꼭대기에는 서까래가 이중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공자의 신위와 공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예식을 행하는 장소이다. 원나라 대덕 6년(1302)에 처음 세웠는데 이후 훼손되어 명나라 영락 9년(1411)에 중건하였다.
만력 28년(1600)에 청유리기와로 지붕을 바꾸었고, 청 건륭 2년(1737)에 황유리기와로 지붕을 바꾸었고, 광서 30년(1906)에 전당을 7칸에 입구 3개를 9칸에 입구 5개로 확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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