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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산이/ 詩와 꽃

시와 꽃_벼꽃_쌀

by isanjo 2023. 7. 22.

# 시와 꽃_벼꽃_쌀

 

벼의 영어명이 Asian Rice인 것만 보아도 그 유래를 추측할 수 있다. 벼에 달려 있는 도정하기 전 껍질이 있는 상태를 나록(羅祿), 나락이라고 하며, 나락의 껍질을 벗긴 것을 쌀이라고 한다. 이 중 겉껍질인 왕겨만 도정하고 속껍질인 쌀겨는 도정하지 않은 푸른색이 나는 쌀을 현미(玄米)라고 한다. 본초명은 갱미(粳米), 곡아(穀芽), (), 도얼(稻蘖), 재생도(再生稻) 등이 있다.

벼는 벼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식용작물이다. 벼속에는 20여 개의 종()이 있으나 오늘날 재배되고 있는 종은 아시아가 원산인 오리자 사티바가 대부분의 벼농사 지대에서 재배되고 있고, 메벼와 찰벼가 있으며, 논에서 재배하는 수도(水稻)와 밭에서 재배하는 육도(陸稻)가 있다.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오리자 글라베르리마는 아프리카의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되고 있다. 오리자 글라베르리마는 찰벼는 없고 모두 메벼이다. 중국의 북부지방에서부터 아르헨티나 중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 평야 지대에서 히말라야 고산지대, 물이 없는 밭에서부터 물이 많은 강변에 이르기까지 재배되는 농작물이다. 벼를 찧은 것을 쌀이라고 하며, 전세계 인구의 약 40% 정도가 주식으로 이용하고 있다. 쌀의 성분은 탄수화물 70~85, 단백질 6.5~8.0, 지방 1.0~2.0정도이다.

벼농사의 기원에 관해서는 인도 기원설, 동남아시아 기원설, 윈남[雲南]-아삼 기원설, 중국 기원설 등이 있는데 6,500~1만 년 전인 신석기시대부터 이들 여러 지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이들 지역에서 세계 여러 곳에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을 거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전파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는 BC.5~6세기경의 탄화미가 경기도 여주군 흔암리에서, 서기전 2300년의 벼껍질이 경기도 일산지역 토탄층에서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화북지방의 쌀알이 둥근 원립종(圓粒種)이 한사군(漢四郡) 이전의 청동기나 그 이전 시대부터 해로나 육로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자연환경에 맞지 않은 북부에서는 크게 보급되지 못하고 남부에서는 자연환경이 알맞아 널리 퍼졌다는 설, 두 번째는 화북에서 남하한 양자강회수지방의 원립종이 도씨동검(挑氏銅劍)과 더불어 서해안으로 들어왔다는 설, 세 번째는 반달 모양 돌칼과 유구 돌도끼가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에서 화북미와 화중화남미가 각각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이와 같이 벼는 삼한시대에는 이미 재배가 정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弁辰)조를 보면 오곡과 벼를 가꾸기에 알맞다[宜種五穀及稻]”라 하였으며, 경상남도 김해읍 회현리 조개무지에서 탄화미가 실제로 출토되기도 하였다.

위의 지역은 인도의 갠지스강, 동남아시아의 메콩강, 중국의 양자강 등의 발원지로서 이 강들의 물줄기를 따라 볍씨가 각 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다.

쌀은 벼 열매의 껍질을 벗긴 알갱이로 구조는 왕겨과피종피호분층배유 및 배아로 되어 있고, 종류로는 멥쌀과 찹쌀처럼 아밀로오스의 함량의 차이에 따라서 나누고, 또한 도정(搗精)의 정도에 따라서 현미5분도미7분도미백미 등으로 분류한다. 쌀의 종류는 일반적으로 쌀알이 짧은 자포니카[短粒種)과 쌀알이 긴 인디카[長粒種]으로 분류한다. 자포니카종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주식으로 삼는 쌀로 주용 생산지는 한국과 일본, 중국의 동북3성 등지이며 이탈리아, 미국의 캘리포니아, 호주 등에서도 재배한다. 인디카종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쌀로 찰기가 없어 우리의 기호에 맞지 않는 품종이다.

우리나라는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함흥평야 이북에서 벼를 재배하기가 힘들었지만 조선후기 들어서 만주까지 재배 한계선이 올라갔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혼란기에 한국인들이 중국으로 이주하면서, 기후가 벼농사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던 동북3성의 벼농사 개발을 주도하였다. 압록강 및 두만강 유역을 먼저 개척한 후, 1933년에는 아무르강에서까지 벼를 키우면서 지으면서 세계 최초로 북위 50도 이북에서 벼농사에 성공했다. 1934년 당시 조선족은 동북3성 인구의 3.3%에 불과했지만 벼 생산력의 90.1%에 육박했다.

우리나라는 1915년부터 벼의 교잡육종이 시작되었고 1971년 수확량이 많은 품종인 통일벼가 육성 보급되면서 1976년부터 쌀을 자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는 통일벼유신벼밀양23삼강벼 등 통일형 품종이 주로 재배되었으며, 1980년대 중반 이후 추청벼동진벼화성벼일품벼 등 양질의 일본형 품종이 육성되어 재배되고 있다. 요즘 식당에서 많이 보이는 신동진쌀동진벼를 개량한 품종이다.

 

<우리말샘>에 수록되어 있는 벼의 이칭은 크게 나락 계열인 나락, 나랙, 나룩, 나록, 나륵, 노락, 벼 계열의 베, , , 베레기, 우끼, 나달, 날기 등이 있다.

 

- 요즈음 우리나라도 2모작이 가능하다. 2023년 07월 26일 서산에서 추수를 한다는 소식이 KTX 뉴스를 통해서 들었다. 오늘 합덕장례식장을 가면서 택시 기사에게 물어봤더니.... 당진도 그런 곳이 있다고 했다.

이 사진은 서해고속도로 평택 IC 부근. 차가 너무 막혀서 카메라를 꺼냈다. 그런데 벼에 이삭이 올라온 것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벼가 포함된 속담>

벼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처서에 장벼 패듯.

일 년 시집살이 못하는 사람 없고 벼 한 섬 못 베는 사람 없다.

딸을 주겠거던 류월 달에 벼 누런 집에 주라.

잘 익은 벼 이삭일수록 더 깊이 내리 숙인다.

 

<쌀이 포함된 속담>

값도 모르고 쌀자루 내민다

개가 겨를 먹다가 말경 쌀을 먹는다

나라의 쌀독이 차야 나라가 잘산다

나무가 묵어야 쌀이 묵는다

등겨 먹던 개가 말경(末境)에는 쌀을 먹는다

등겨 먹던 개는 들키고 쌀 먹던 개는 안 들킨다

떡도 떡같이 못 해 먹고 찹쌀 한 섬만 다 없어졌다

량식쌀을 싸 메고 다닌다

마당질 뒤의 쌀자루

밤 쌀 보기 남의 계집 보기

밥을 굶어도 조밥을 굶지 말고 흰쌀밥을 굶으라

밭 팔아 논 살 때는 이밥 먹자는 뜻

배고픈 놈이 흰쌀밥 조밥 가리랴

섣달그믐께 흰 쌀떡 치는 소리

세끼 굶으면 쌀 가지고 오는 놈 있다

세벌쌀에 뉘 섞이듯

숯은 달아서 피우고 쌀은 세어서 짓는다

싸라기 쌀 한 말에 칠 푼 오 리라도 오 리 없어 못 먹더라

쌀 먹은 개 욱대기듯

쌀 주머니를 들고[메고] 다닌다

쌀 한 알 보고 뜨물 한 동이 마신다

쌀고리에 닭이라

쌀광에 든 쥐

쌀독에 거미줄 치다

쌀독에 앉은 쥐

쌀독에서 인심 난다

쌀독의 쥐 쌀 먹는다

쌀뒤주가 차고 쌀독이 넘어 나야 부자라고 한다

쌀에 뉘 (섞이듯)

쌀에서 뉘 고르듯

쌀은 쏟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

아궁이가 쌀밥을 먹는다

얼크러진 그물이요 쏟아 놓은 쌀이다

일천 관 불붙이고 동관에서 쌀알 줍는다

일천 석 불붙이고 쌀알 줍는다

장마당에 쌀자루는 있어도 글 자루는 없다

재산을 잃고 쌀알을 줍는다

쥐 잡으려다가 쌀독 깬다

초 판 쌀이라

큰 쌀독 열어 놓고 손님 대접한다

 

 

 

은 단순하게 곡물의 한 종류가 아닌 곡식의 대명사로 쓰였다. 가장 흔한 예로 쌀밥에 고깃국이라는 말을 예로 들 수 있다. 왕이나 위정자가 흉년에는 쌀밥을 마음 편히 먹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상투적으로 하는 것에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또한 쌀의 별칭이 옥식(玉食)’인 것만 보아도 일반인에게 쌀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도미반(稻米飯 쌀밥), 도반(稻飯)을 속칭 미반(美飯)’이라고 불렀다. 찹쌀은 찰벼에서 나온 쌀이라는 의미의 나미(糯米)와 끈기가 있는 쌀이라는 의미의 점미(粘米)로 불린다. 찹쌀밥은 나미반(糯米飯), 나반(糯飯), 점반(粘飯)이다.

우리나라 옛 문헌 벼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은 많으나 구채적인 서술한 내용을 적어 보인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2회 온다. 한 번은 백제 다루왕 62월에 처음으로 논에서 벼를 제배한 기록이고 한 번은 고이왕 92월에 南澤에서 논에서 벼를 제배한 기록이다. 가화(嘉禾)’를 바쳤다는 기록이 모두 7회 보이며, 풍년이 들거나 벼이삭이 상했다거나 한 기록이 9회 보이는데, 모두 신라와 백제의 기록에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 고구려에서는 도전(稻田)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쌀밥을 맛있게 먹는 내용>

서거정의 󰡔사가시집󰡕에는 라는 제목이 시가 있다. 제목은 벼이지만 결국 이야기는 밥으로 연결된다. 서거정(1420~1488)󰡔사가시집󰡕에도 쌀밥의 향기가 숟가락에 넘쳐흐르는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 있다. 성현(1439~1504)󰡔허백당시집󰡕에는 예나 지금이나 결국 보리밥보다는 쌀밥이 좋은 음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유(張維:1587~1638)󰡔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에는 물고기와 햅쌀밥이 입맛을 돋워주는 내용이 있고, 이현일(李玄逸:1627~1704)󰡔갈암집(葛庵集)󰡕에는 쌀밥과 채소를 먹지 않아 지나치게 수척하였다는 내용이 있고, 이익(1681~1763)󰡔성호전집󰡕에는 국밥이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성호는 물고기나 육류, 채소 등을 섞은 골동반(骨董飯)과 골동갱(骨董羹)을 둘 다 좋아하지만, 특히 배고플 때는 국에 밥을 말은 국밥이 최고라고 말한다.

 

골동은 내 아무리 먹어도 좋은데 / 骨董吾無厭

창자를 채우기로는 국밥이 최고일세 / 塡腸澆饡佳

목에서 삼키면 바로 내 뱃속에 있으니 / 下嚥惟己分

배를 두드리며 사는 태평한 생애로세 / 鼓腹是生涯

망녕되이 도제를 가볍게 여기려 하고 / 妄欲輕陶䱥

애오라지 이를 유해와 맞먹는다 하노라 / 聊將當庾鮭

누가 시국의 혼란함에 비겼는가 / 誰方時混混

쌀밥과 나물이 素食에 제격이로세 / 稻菜合淸齋

 

이 시를 읽으니 일제강점기에 쌀 한줌과 나물로 끊인 죽에 끼니를 때웠다는 어머니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상정(李象靖:1711~1781)󰡔대산집(大山集)󰡕에는 쌀밥에 채소만 먹는 것으로 기력을 회복할 수 없다고 내용이 있다.

 

 

<백성들이 쌀밥은 먹는다는 내용>

이색(1328~1396)󰡔목은시고󰡕에는 풍년이 들어 백성들도 쌀밥을 먹는 내용이 있고, 윤선도(1587~1671)󰡔고산유고(孤山遺稿)󰡕에는 살림이 넉넉해서 자신들은 술을 마시고 따라온 시종도 흰쌀밥을 먹는 정황이 묘사되어 있고, 장유(1587~1638)󰡔계곡선생집에는 늘 흉년이 들다 간만에 풍년이 들어 집집마다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창협(1651~1708)󰡔농암집󰡕에는 너무 풍족하여 모두가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의식(衣食) 걱정이 없어 놀고 즐기던 것이 점차 풍속이 되어 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는 내용도 있다. 이익(1681~1763)󰡔성호사설󰡕에는 전라도(全羅道)는 논이 많아 물을 가두었다가 때가 되면 모내기를 하고, 농사일이 끝나면 백성은 모두 쌀밥을 먹으며 콩과 보리를 천하게 여긴다는 내용이 실려 있고, 신익전(申翊全:1605~1660)󰡔동강유집(東江遺集)󰡕에는 밀양은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해 백성들이 모두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다고 하였다. 물론 이 말 역시 완전히 믿을 수는 없으나 다른 곳에 비해 형편이 낳았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서영보(徐榮輔:1759~1816)󰡔죽석관유집󰡕에는 재령(載寧)이 비롯 북쪽이지만 강도 있고 땅도 비옥해서 일반 백성들이 쌀밥에 물고기를 먹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덕무(1741~1793)󰡔청장관전서에도 아버지가 벼를 팔아서 생선국에 쌀밥을 지어 오순도손 이야기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백성을 생각하는 위정자의 마음이 담긴 내용>

아래의 기사는 기근이 들었을 때 왕을 비롯한 위정자의 이야기이다. 조선시대 임금의 일을 기록한 󰡔열성어제󰡕󰡔국조보감󰡕, 김육(金堉:1580~1658)󰡔잠곡유고󰡕에는 기근에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하는 것을 안타깝고 쌀밥이 맛이 없고,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상투적인 말과 가뭄의 재변으로 인하여 구언(求言)하는 왕의 교서에도 사방의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다가 굶어 죽는 것을 생각하니 흰 쌀밥을 먹을 수가 없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황경원(黃景源:1709~1787)󰡔강한집󰡕에는 함흥부윤을 지낸 황정(黃晸)의 묘지명에는 황정이 보리가 익는 늦봄과 여름에는 그동안 먹던 쌀밥은 먹지 않고 거친 보리밥으로 바꾼 그의 진정으로 백성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정조(正祖:1752~1800)󰡔홍재전서󰡕에는 할아버지 영조(英祖)는 아무리 작은 재해라도 쌀밥을 드시지 않은 인품을 이야기 하였고, 1781년 새해의 권농 하교에서 백성들이 생계를 걱정하면 옥처럼 귀한 쌀밥을 먹을 때면 이 쌀을 얻기 위해 땀 흘린 백성을 생각했다고 말하였고, 부유한 사람이라야 그나마 쌀밥을 먹고 그 이하는 쌀밥은 구경도 못하는 현실을 당시의 왕인 정조가 초계문신과 나눈 이 내용은 말만 들어도 마음이 아파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백성들은 임금이 진실로 자신들을 걱정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백성의 고통을 노래한 내용>

쌀은 예나 지금이나 늘 옆에서 볼 수 있는 곡물이지만 그렇다고 늘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닌듯하다. 쌀은 백성의 고혈을 대표하는 언어이다. 1년 내내 농사를 짓지만 결국은 쌀은 다른 곳으로 사라지는 현실을 목도하며 지은 작품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어느 곳에서나 존재했다. 이규보(1168~1241)󰡔동국이상국후집󰡕에는 장안의 부호들은 개나 말에게도 쌀밥을 먹이고 종들도 청주를 마음껏 마시는데 막상 농사를 짓는 엄한 백성은 국령(國令)으로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청주를 마시게 하고 쌀밥을 먹게 하는 것이 바로 농사를 권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규보의 말이 역설적으로 보이나 결국 농사를 짓는 것이 내가 배부르게 먹기 위한 것임을 생각할 때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국이상국후집󰡕에 수록된 시에는 이런 실상을 잘 보여주는 시가 있다.

 

청주를 마시고 쌀밥을 먹는 것이 / 淸醪與白飯

농사를 권장하는 바탕이니 / 所以勸其稼

이들의 입이나 배에 맡길 것이지 / 口腹任爾爲

무엇 때문에 국금을 내리는가 / 國禁何由下

의론이 비록 조정에서 나왔다 하여도 / 議雖出朝廷

망극하신 성은 마땅히 용서하시리 / 聖恩宜可赦

반복해서 사리를 생각해보니 / 反覆思其理

놀고먹는 자보다 만 배나 먹어야 하네 / 萬倍坐食者

 

권근(1352~1409)󰡔양촌선생문집󰡕「(苦熱行)에도 1년 내내 힘들게 농사를 짓지만 결국 자신은 쌀 한 톨 입에 넣지 못하는 백성의 애처로움을 이야기 하고 있다. 서거정(1420~1488)󰡔사가시집󰡕에는 경우(景愚)의 경운도(耕耘圖)의 화제를 쓰면서 다른 시에서 자신은 늘 쌀밥과 막걸리를 먹는다고 자랑하는 듯이 말하다가 이 시에서는 앞의 시와 전혀 다른 농부의 고통을 왕에게 전할 방법이 없다고 한탄한다. 이 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제목이 경운도(耕耘圖)인만큼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맹자가 말한 피일시차일시의 마음으로 이해된다.

 

봄엔 갈고 여름엔 매고 한가할 때 없어라 / 春耕夏耨不曾閑

모진 고생이 온통 다 전답 사이에 있구려 / 辛苦都存畎畝間

쌀밥 드시는 대궐은 만리처럼 아득하니 / 玉食九重天萬里

어떡하면 이 어려움을 옮겨다 보여드릴꼬 / 若爲移獻此艱難

 

성현(成俔:1439~1504)󰡔허백당시집󰡕에는 추수 후 밤이 되어서야 겨우 쌀을 찧는 고단한 농민의 모습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행(李荇:1478~1534)󰡔용재집(容齋集)󰡕에는 한양에서는 하인들도 쌀밥에 고기를 먹는데, 남쪽에서는 선비도 덜 여문 벼이삭도 먹지 못하는 상황을 통탄한다. 이와 아울러 󰡔청장관전서󰡕에는 승려를 비하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흉년에도 쌀밥을 먹은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정온(鄭蘊:1569~1641)󰡔동계집󰡕에도 백성들이 농토가 황폐하여 곡식을 심을 수 없어 쌀밥은 구경하기도 힘든 정황을 읊은 시가 보인다.

이식(李植:1584~1647)󰡔택당선생집󰡕에는 현재 북한 자강도 지역인 평안북도 강계(江界) 지역은 땅이 척박하여 논벼 대신에 밭벼를 재배하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당시 변방 관소(館所)의 신료들이 변방의 수졸(戍卒)보다 못한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조경(1586~1669)󰡔용주유고(龍洲遺稿)에는 열원리(列院里)에 묵으며 당시 온 나라의 백성들은 기근으로 인해 지게미와 쌀겨도 먹지 못하는 상황에도 도성의 벼슬아치는 백성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쌀밥에 고기반찬을 먹으며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민구(李敏求:1589~1670)󰡔동주집((東州集)󰡕에도 유배지인 아산에서 지내면 느낌 내용을 기록하였는데, 그 속에는 애써 고생해도 세금을 내고 나면 나는 쌀밥 지을 곡식이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서울에서는 서민도 쌀밥을 먹고 있지만 그 밥이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는 것을 슬퍼하는 내용과 지난해는 새로 지은 쌀밥이 윤기가 나지만 언제나 입에 쓰다고 여종을 나무랐는데 올해는 6월에 가뭄이 들어 거친 쌀도 구하지 못하니 그 덕에 여종은 욕을 먹을 일이 없게 생겼다고 넋두리하는 내용도 보인다.

윤기(尹愭:1741~1826)󰡔무명자집(無名子集)󰡕「泮中雜詠에는 성균관의 음식이 매우 열악하여 쌀밥의 양이 매우 적어 허기를 달랠 정도라고 말하고 있다.

정약용(1762~1836)󰡔여유당전서󰡕에는 양역의 고통을 이야기하며 집이 있고 쌀밥을 먹는 사람들이 왜 양역에 응하겠냐며 백성들이 매우 힘든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렸다.

 

 

 

<쌀을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내용>

이규보(1168~1241)󰡔동국이상국전집󰡕에는 문 선로(文禪老)가 쌀과 솜을 보내준 것에 대 사례하는 시가 있고, 이색(1328~1396)󰡔목은시고󰡕에는 염동정(廉東亭)이 밀보리[牟來]와 현미[糙米]를 보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는 시가 있다.

 

밀보리로 백성 기르고 벼는 산더미 같아라 / 來牟率育稻如京

매양 시경을 읊으면서 길이 탄식했었네 / 每詠詩章發嘆長

본디 진에 있을 때도 마냥 즐거웠었는데 / 自是在陳猶最樂

더구나 이젠 흰 쌀밥으로 배불릴 수 있음에랴 / 況今璀璨可撑腸

 

벼 논이 송경을 끼고 들판을 연했는데 / 稻田連野擁松京

가을 벼이삭 이미 자랐다고 모두 말하네 / 共說秋來穟已長

누런 벼이삭 다 거두어 백옥같이 찧으면 / 卷盡黃雲舂白玉

향그런 햅쌀밥으로 쇠한 창자 보충하리라 / 剩敎香滑補衰腸

 

이색의 󰡔목은시고󰡕에는 찹쌀에 꿀을 버무리고 거기에 대추와 밤 그리고 잣까지 곁들인 지금의 영양돌솥밥을 맛있게 먹는 장면과 아들 집에서 찰밥을 보내온 시도 시려 있다.

 

 

 

<쌀밥과 생선에 대한 내용>

하얀 쌀밥과 고기국, 이밥에 고기국은 맛있는 식사의 표현이면서 먹고 살만한 집안의 대표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햇반에 스팸과는 성격이 좀 다르지만 표현상으로만 볼 때는 얼추 비슷할듯하다. 조선시대에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쌀밥에 생선국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제현(1287~1367)󰡔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櫟翁稗說)에는 쌀밥이 손님을 대접하는 기본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손님을 대접할 때 특별한 음식보다는 쌀밥에 생선국이면 충분하다고 이야기한다. 이 내용을 다른 쪽으로 해석해보면 당시에도 쌀이 아주 귀하지 않았으며 이제현(李齊賢)의 명성에 비추어 소탈한 성품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정도전(1342~1398)󰡔삼봉집󰡕에도 친구인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의 집에 머물 때 소반엔 흰쌀밥과 이웃에서 보낸 생선 반찬에 차려준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고마움을 시로 표현한 내용이 있다.

 

잔에는 금빛 같은 노란 술인데 / 杯酌黃金嫰

소반엔 정히 찧은 흰 쌀밥일레 / 盤餐白粲精

이웃에서 좋은 생선 보내를 오니 / 嘉魚鄰舍惠

손 반기는 주인의 온정이로세 / 好客主人情

 

서거정(1420~1488)사가시집에는 김유완(金有完)이 강호(江湖)에는 쌀과 생선이 풍족한데 무엇 때문에 외진 시골에서 고생하느냐고 김유완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을 읊으며, 흉년에는 풍족하게 먹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사는 곳에 따라 흉년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깊게 동감한다. 이민구(1589~1670)󰡔동주집󰡕에는 쌀밥에는 생선회가 최고이며 나이가 먹으니 주린 배를 채우는 데는 쌀밥과 생선이 최고라고 하였다.

김윤식(金允植:1835~1922)󰡔운양집(雲養集)󰡕에는 쌀밥에 생선회를 먹으며 사는 인생을 평범하게 느끼는 내용이 있고, 조긍섭(1873~1933)󰡔암서집󰡕에는 저자가 친구들과 창녕의 현창(玄倉)에 모여 시골의 어부와 농부를 찾아가 쌀밥에 생선국을 먹으며 생을 마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읊은 시가 있다.

 

 

<쌀밥을 다양하게 활용한 내용>

홍만선(洪萬選:1643~1715)󰡔산림경제󰡕에는 다양한 서적을 인용하여 섭생과 치료에 찹쌀밥을 사용하는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석창포(石菖蒲)를 뿌리로 즙()을 내어 찹쌀밥과 누룩가루를 넣고 술을 빚어 먹으면 통신(通神)도 되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내용과 오리알 절일 때 알에 소금과 재[]를 고루고루 섞어 쌀밥에 담가서 소금재 속에 굴려 둥글게 만들어 독 안에 말려서 갈무리하면 여름까지 보관할 수 있는 방법도 소개되어 있다. 또 종기를 터드린 뒤 찹쌀밥을 붙여주면 고름을 빨아내는 데 특효라고 되어 있고, 마독창(馬毒瘡)에 찹쌀밥을 식혀 상처 위에 붙여 주면 바로 낫는다고 되어 있다.

 

 

 

<쌀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

󰡔대동야승󰡕 <해동잡록>에는 맹사성의 부인이 묵은 녹미(祿米)가 맛이 없어 이웃에서 쌀을 빌려 햅쌀밥을 올리자 맹사성이 녹미를 두고 왜 빌려왔느냐고 화를 낸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글을 읽고 나니 문득 그래도 맹사성은 묵은쌀이라도 집에 두고 먹을 처지는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권필(權韠:1569~1612)󰡔석주집(石洲集)󰡕에는 광흥창(廣興倉) 옆에 사는 백성이 매일 창고의 쌀을 훔쳐서 생활하는 재미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태창(太倉) 곁에 집을 두고 사는 백성이 있었는데 장사를 하지도 않고 농사를 짓지도 않으면서 저녁마다 밖에 나갔다 밤에 돌아오면 반드시 다섯 되의 쌀을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그 쌀을 어디서 얻었느냐고 물으면 말해 주지 않아 그 처자식들도 알지 못하였다. 이렇게 한 지 수십 년이 되도록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고 화려한 옷을 입을 수 있었으나 그 집을 보면 살림이 텅 비었다.

그 백성이 병들어 죽을 즈음에 은밀히 아들에게 말하기를 창고 몇 번째 기둥에 구멍이 있는데, 크기가 객지(客指)만 하여 그 속에 쌓인 쌀이 막혀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너는 손가락 굵기만 한 나무 막대를 가지고 가서 구멍 속을 후벼서 쌀이 흘러나오게 하되 하루에 다섯 되가 되거든 중지하여 욕심껏 취하지 말거라.” 하였다.

그 백성이 죽은 뒤 아들이 이어받아 그 일을 하여 옷과 음식이 그 백성이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이윽고 그 아들은 구멍이 작아서 쌀을 많이 꺼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여 끌로 파서 구멍을 크게 만들어 하루에 몇 말씩 쌀을 취하였다. 그것도 부족하여 또 끌로 파서 구멍을 더 크게 만드니, 창고를 지키는 관리가 못된 짓을 알아차리고 그 아들을 잡아서 죽였다.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서의 쌀>

이민구(1589~1670)󰡔동주집󰡕에는 나주 목사로 있다가 파직당한 유석(柳碩)에게 당신은 그래도 그나마 나와 달리 쌀밥 먹으며 편히 지내니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있다. 또 심양에 볼모로 가는 조카 이석규를 전송하는 시에서도 역시 쌀밥은 고기와 함께 권력과 부의 상징을 대변하는 단어로 묘사되어 있다.

 

평화로운 때 높은 지위에 있으면 / 時平居大位

자손들이 그 성공을 힘입어 / 子孫蒙其成

쌀밥에 살진 고기 물리게 먹으며 / 持粱厭肥肉

좋은 집에서 편안히 지내는데 / 息偃在華楹

 

한장석(韓章錫)󰡔미산집(眉山集)󰡕에는 돌잡이에 사용되는 물건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 중 쌀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쌀밥을 먹이는 이유는 하늘이 주신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고 소반에 쌀을 담은 것은 복록을 주기 위해서라고 설명하였다.

 

 

<상을 치를 때 쌀밥을 먹지 않는 내용>

조선시대에는 상을 치를 때 거친 밥을 먹고 쌀밥은 먹지 않는 것이 효()라고 여겨 이것을 실천한 사례들이 자주 보인다. 송암(松巖) 이로(李魯:1544~1598)는 상을 치른 후 1년 만에 거친 밥은 먹었으나 쌀밥은 먹지 않았으며,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도 80살이 넘도록 쌀밥을 먹지 않았으며, 우암 송시열(1607~1689) 역시 상을 치른 뒤라 쌀밥을 먹지 않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산(眉山) 한장석(韓章錫:1832~1894) 역시 삼년상 동안 쌀밥을 먹지 않은 이야기가 있으며, 암서 조긍섭(1873~1933) 역시 상을 치를 때 쌀밥이 없었다고 전한다.

권근(1352~1409)󰡔陽村集󰡕에도 상중에 쌀밥을 먹는 자신이 효도와 멀다고 하면서 상복을 벗고 길복(吉服)으로 바꾸어 몸을 영화스럽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나 조선초기에는 조선후기처럼 상중에 쌀밥을 먹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1607~1689)󰡔송자대전󰡕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신도비명의 병서(幷序)에는 정몽주의 초막 살이 3년이 상중에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던 풍습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는 내용으로 볼 때 고려말기에는 일반적으로는 상중에도 쌀밥을 먹었다는 사실의 반증이라고 하겠다. 조선초기 학자인 권근이 상을 치를 때 쌀밥을 먹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때 조선초기까지도 상중에 쌀밥을 먹는 것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쌀밥이 귀하다는 내용>

권문호(權好文:1532~1587)󰡔송암집(松巖集)󰡕에는 벼이삭이 피고 얼마의 시간이 흘러 벼꽃이 지고 벼의 색이 녹색에서 황금색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즐거워하며 그 모습이 낙화(洛花)에 비유하였고, 누런 벼이삭을 황금에 비유하고 방아 찧은 쌀은 맑은 옥에 비유하며 한 수저의 흰쌀밥이 향기 좋은 참깨를 얕본다고 하였다.

안정복(1712~1791)󰡔동사강목󰡕에는 추적(秋適)이 손님을 접대할 때 쌀밥에다 생선으로 국 정도면 충분하지 돈을 들여서 진기한 음식을 장만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조경(1586~1669)󰡔용주유고󰡕에는 쌀이 귀하여 쌀밥과 술을 마시지 못하고 기장밥과 햇차로 대신한 내용과 생일날 흰 쌀밥은 먹으며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김윤식(1835~1922)󰡔운양집󰡕에는 제주도 사람들은 명절인 설날과 추석 그리고 한식에만 쌀밥을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조긍섭(1873~1933)󰡔암서집󰡕에는 정월대보름에 먹는 향기로운 오곡밥을 해매다 배불러 먹고 싶은 소망을 담은 시()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