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벼_쌀_밥
벼의 영어명이 Asian Rice인 것만 보아도 그 유래를 추측할 수 있다. 벼에 달려 있는 도정하기 전 껍질이 있는 상태를 나록(羅祿), 나락이라고 하며, 나락의 껍질을 벗긴 것을 쌀이라고 한다. 이 중 겉껍질인 왕겨만 도정하고 속껍질인 쌀겨는 도정하지 않은 푸른색이 나는 쌀을 현미(玄米)라고 한다. 본초명은 갱미(粳米), 곡아(穀芽), 도(稻), 도얼(稻蘖), 재생도(再生稻) 등이 있다.
벼는 벼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식용작물이다. 벼속에는 20여 개의 종(種)이 있으나 오늘날 재배되고 있는 종은 아시아가 원산인 오리자 사티바가 대부분의 벼농사 지대에서 재배되고 있고, 메벼와 찰벼가 있으며, 논에서 재배하는 수도(水稻)와 밭에서 재배하는 육도(陸稻)가 있다.
벼농사의 기원에 관해서는 인도 기원설, 동남아시아 기원설, 윈남[雲南]-아삼 기원설, 중국 기원설 등이 있는데 6,500~1만 년 전인 신석기시대부터 이들 여러 지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이들 지역에서 세계 여러 곳에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삼한시대에는 이미 재배가 정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弁辰)조를 보면 “오곡과 벼를 가꾸기에 알맞다[宜種五穀及稻]”라 하였으며, 경상남도 김해읍 회현리 조개무지에서 탄화미가 실제로 출토되기도 하였다.
쌀은 벼 열매의 껍질을 벗긴 알갱이로 구조는 왕겨ㆍ과피ㆍ종피ㆍ호분층ㆍ배유 및 배아로 되어 있고, 종류로는 멥쌀과 찹쌀처럼 아밀로오스의 함량의 차이에 따라서 나누고, 또한 도정(搗精)의 정도에 따라서 현미ㆍ5분도미ㆍ7분도미ㆍ백미 등으로 분류한다.
우리나라는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함흥평야 이북에서 벼를 재배하기가 힘들었지만 조선후기 들어서 만주까지 재배 한계선이 올라갔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혼란기에 한국인들이 중국으로 이주하면서, 기후가 벼농사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던 동북3성의 벼농사 개발을 주도하였다. 압록강 및 두만강 유역을 먼저 개척한 후, 1933년에는 아무르강에서까지 벼를 키우면서 지으면서 세계 최초로 북위 50도 이북에서 벼농사에 성공했다.
벼의 이칭은 크게 나락 계열인 나락, 나랙, 나룩, 나록, 나륵, 노락, 벼 계열의 베, 뵈, 비, 베레기, 우끼, 나달, 날기 등이 있으며, 벼가 포함된 속담이 5건, 쌀이 포함된 속담이 40건 보인다.
‘쌀’은 단순하게 곡물의 한 종류가 아닌 곡식의 대명사로 쓰였다. 가장 흔한 예로 ‘쌀밥에 고깃국’이라는 말을 예로 들 수 있다. 왕이나 위정자가 흉년에는 ‘쌀밥을 마음 편히 먹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상투적으로 하는 것에도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또한 쌀의 별칭이 ‘옥식(玉食)’인 것만 보아도 일반인에게 쌀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도미반(稻米飯 쌀밥), 도반(稻飯)을 속칭 ‘미반(美飯)’이라고 불렀다. 찹쌀은 찰벼에서 나온 쌀이라는 의미의 나미(糯米)와 끈기가 있는 쌀이라는 의미의 점미(粘米)로 불린다. 찹쌀밥은 나미반(糯米飯), 나반(糯飯), 점반(粘飯)이다.
※ <백성의 고통을 노래한 내용>
쌀은 예나 지금이나 늘 옆에서 볼 수 있는 곡물이지만 그렇다고 늘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닌듯하다. 쌀은 백성의 고혈을 대표하는 언어이다. 1년 내내 농사를 짓지만 결국은 쌀은 다른 곳으로 사라지는 현실을 목도하며 지은 작품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어느 곳에서나 존재했다.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후집에는 장안의 부호들은 개나 말에게도 쌀밥을 먹이고 종들도 청주를 마음껏 마시는데 막상 농사를 짓는 엄한 백성은 「국령(國令)으로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청주를 마시게 하고 쌀밥을 먹게 하는 것이 바로 농사를 권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규보의 말이 역설적으로 보이나 결국 농사를 짓는 것이 내가 배부르게 먹기 위한 것임을 생각할 때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국이상국후집에 수록된 시에는 이런 실상을 잘 보여주는 시가 있다.
청주를 마시고 쌀밥을 먹는 것이 / 淸醪與白飯
농사를 권장하는 바탕이니 / 所以勸其稼
이들의 입이나 배에 맡길 것이지 / 口腹任爾爲
무엇 때문에 국금을 내리는가 / 國禁何由下
의론이 비록 조정에서 나왔다 하여도 / 議雖出朝廷
망극하신 성은 마땅히 용서하시리 / 聖恩宜可赦
반복해서 사리를 생각해보니 / 反覆思其理
놀고먹는 자보다 만 배나 먹어야 하네 / 萬倍坐食者
※ <쌀밥과 생선에 대한 내용>
하얀 쌀밥과 고기국, 이밥에 고기국은 맛있는 식사의 표현이면서 먹고 살만한 집안의 대표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햇반에 스팸’과는 성격이 좀 다르지만 표현상으로만 볼 때는 얼추 비슷할듯하다. 조선시대에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쌀밥에 생선국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제현(1287~1367)의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櫟翁稗說)」에는 쌀밥이 손님을 대접하는 기본적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손님을 대접할 때 특별한 음식보다는 쌀밥에 생선국이면 충분하다고 이야기한다. 이 내용을 다른 쪽으로 해석해보면 당시에도 쌀이 아주 귀하지 않았으며 이제현(李齊賢)의 명성에 비추어 소탈한 성품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정도전(1342~1398)의 삼봉집에도 친구인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의 집에 머물 때 소반엔 흰쌀밥과 이웃에서 보낸 생선 반찬에 차려준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며 고마움을 시로 표현한 내용이 있다.
잔에는 금빛 같은 노란 술인데 / 杯酌黃金嫰
소반엔 정히 찧은 흰 쌀밥일레 / 盤餐白粲精
이웃에서 좋은 생선 보내를 오니 / 嘉魚鄰舍惠
손 반기는 주인의 온정이로세 / 好客主人情
※ <쌀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
대동야승 <해동잡록>에는 맹사성의 부인이 묵은 녹미(祿米)가 맛이 없어 이웃에서 쌀을 빌려 햅쌀밥을 올리자 맹사성이 녹미를 두고 왜 빌려왔느냐고 화를 낸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글을 읽고 나니 문득 그래도 맹사성은 묵은쌀이라도 집에 두고 먹을 처지는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권필(權韠:1569~1612)의 석주집(石洲集)에는 광흥창(廣興倉) 옆에 사는 백성이 매일 창고의 쌀을 훔쳐서 생활하는 재미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태창(太倉) 곁에 집을 두고 사는 백성이 있었는데 장사를 하지도 않고 농사를 짓지도 않으면서 저녁마다 밖에 나갔다 밤에 돌아오면 반드시 다섯 되의 쌀을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그 쌀을 어디서 얻었느냐고 물으면 말해 주지 않아 그 처자식들도 알지 못하였다. 이렇게 한 지 수십 년이 되도록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고 화려한 옷을 입을 수 있었으나 그 집을 보면 살림이 텅 비었다.
그 백성이 병들어 죽을 즈음에 은밀히 아들에게 말하기를 “창고 몇 번째 기둥에 구멍이 있는데, 크기가 객지(客指)만 하여 그 속에 쌓인 쌀이 막혀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너는 손가락 굵기만한 나무 막대를 가지고 가서 구멍 속을 후벼서 쌀이 흘러나오게 하되 하루에 다섯 되가 되거든 중지하여 욕심껏 취하지 말거라.” 하였다.
그 백성이 죽은 뒤 아들이 이어받아 그 일을 하여 옷과 음식이 그 백성이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이윽고 그 아들은 구멍이 작아서 쌀을 많이 꺼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여 끌로 파서 구멍을 크게 만들어 하루에 몇 말씩 쌀을 취하였다. 그것도 부족하여 또 끌로 파서 구멍을 더 크게 만드니, 창고를 지키는 관리가 못된 짓을 알아차리고 그 아들을 잡아서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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