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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박물관/국립김해박물관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5_2층_2

by isanjo 2025. 2. 8.

2024_09_국립김해박물관15_2층_2

 

# 질박하고 검소한 "가야 사람들의 삶"

 

가야사람들은 주로 움집이나 초가집에서 살았지만 2층으로 만든 다락집에서 살기도 했다. 가야사람들의 집터에서는 부뚜막과 음식을 찌는 시루, 이동식 부뚜막 토기도 발견된다. 가야 사람 들은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얻었지만, 고기잡이와 조개 채집도 여전히 중요했다. 김해 봉황동(옛 회현리), 부원동뿐만 아니라 내륙 지역인 고령에서도 바다 생선 뼈와 조개껍데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가야 사람들은 낙동강을 통해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 가야도성과 궁성의 모습이 드러나다.


가야의 도성과 궁성은 고고학 조사로 그 모습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봉황토성은 금관가야의 도성과 궁성 구조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봉황토성 안팎에는 넓은 건물터와 땅보다 높게 지어진 건물, 토성, 환호[방어용 도랑], 의례 공간, 호안[강기슭이나 둑을 보호하는 장치] 시설 등이 있다. 금관가야는 대성동 언덕을 중심으로 무덤이 있는 지역과 봉황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두 지역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대가야의 도성은 고령읍 서쪽 가장자리인 주산자락에 있으며, 그 아래쪽의 나지막한 언덕에 궁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주산성 아래로 대가야의 왕들이 묻힌 지산동 고분군이 자리한다. 이곳에서는 고령읍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

가야리유적은 아라가야의 궁성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가야리유적은 주변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토성과 건물터 등이 조사되었다. 유적 주변으로는 의례 공간으로 추정되는 당산유적과 아라가야의 왕들이 묻힌 말이산고분군이 자리한다.

 

 

 

◆ 1. 단지_호(壺)

- 4~5세기

- 김해 봉황동(鳳凰洞)

 


◆ 2. 손잡이 달린 단지_파수부호(把手附壺)

- 4~5세기

- 김해 봉황동(鳳凰洞)

 

 

 

◆ 3. 손잡이 달린 바리_파수부발(把手附鉢)

- 4~5세기

- 김해 봉황동(鳳凰洞)

 

 

◆ 4. 흙으로 구워 만든 둥근관_토관(土管)

- 4~5세기

- 김해 봉황동(鳳凰洞)

 

# 그릇들

 

◆ 5. 굽다리 접시_고배(高杯)

- 4~5세기

- 김해 봉황동(鳳凰洞)

 

 

◆ 6. 넓은 입 항아리_광구호(廣口壺)

- 4~5세기

- 김해 봉황동(鳳凰洞)

 


◆ 6. 넓은 입 항아리_광구호(廣口壺)

- 4~5세기

- 김해 봉황동(鳳凰洞)


◆ 12. 흑인형_토우(土偶)

- 3~5세기

- 김해 부원동

 


◆ 11. 기와_와(瓦)

- 3~4세기

- 김해 부원동(府院洞)

 


◆ 9. 돌공이_고석(敲石)

- 3~4세기

- 김해 부원동(府院洞)

◆ 10. 숫돌_지석(砥石)

- 3~4세기

- 김해 부원동(府院洞)

 

 

◆ 7. 접시_배(杯)

- 3~4세기

- 김해 부원동(府院洞)

 

 

 

 

◆ 1. 손잡이 달린 항아리_파수부호(把手附壺)

- 6세기

- 고령 연조리[본관동本館洞]

 

 

◆ 2. 손잡이 달린 항아리_파수부호(把手附壺)

- 6세기

- 고령 연조리[본관동本館洞]

 

 

 

 

◆ 3. 독_옹(甕)

- 6세기

- 고령 연조리[본관동本館洞]

 

 


◆ 4. 뚜껑_개(蓋)

- 6세기

- 고령 연조리[본관동本館洞]

 

 


◆ 5. 접시

- 6세기

- 고령 연조리[본관동本館洞]

 

 

 

 

◆ 8. 집모양 토기

- 4~5세기

- 창원 다호리

 

 

◆ 9. 집모양 토기_가형토기(家形土器)

- 삼함시대. 4~5세기

- 함안 소포리(小浦里)

 

 

 

◆ 10. 편병(扁甁)

- 6세기

- 김해 원지리(元支里)

 

 

 

 

 

◆ 6. 전돌_전(塼)

- 5~6세기

- 고령 송림리(松林里)

 

 

◆ 7. 연꽃무늬 전돌_연화문전(蓮花紋塼)

- 5~6세기

- 고령 송림리(松林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