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14일>
◆ 용양봉저정(龍驤鳳䎝亭)
동작구 가장자리에 있다. 여기서 보이는 한강 이북의 산봉우리들이 마치 용(龍)이 머리를 들며(驤) 솟아오르고, 봉황(鳳)이 날아오르는 것(䎝) 같다'하여 '용양봉저정(龍驤鳳䎝亭)'이란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정면에 한강대교와 올림픽대로가 있고, 한강 건너에 많은 아파트와 고층 건물이 있어 북한산과 남산이 잘 보이지 않는다.
또 용양봉저정 뒤에는 대형 교회의 건물이 있어 풍경이 그리 좋지는 않다. 너무 공간이 좁은 것이 아쉽다. 그래도 지나가다 들러서 땀을 식히기에는 아주 안성마춤인 자리이다. 밖은 땀이 날 정도로 더운 날씨지만 정자에 않아 있으면 금새 땀이 식었다. 이따금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입구는 문이 닫혀 있고, 관람로는 왼쪽에 Z자로 되어 있어 몸이 불편한 분들도 이용하기 좋게 되어 있다.
# 용양봉저정 표지판
# 용양봉저정( 龍驤鳳䎝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용양봉저정은 정조(1776-1800)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갈 때 배다리로 한강을 건넌 후 쉬어가던 노랑행궁의 중심건물이다. 왕이 점심을 들었다하여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하였다.
『홍재전서』14권 [용양봉저정기]의 기록을 보면, 이곳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양원이 소유한 망해정望海亭이라는 정자였으나 정조13년(1789)에 정조가 구입하였다고 한다. 정조 17년(1793)에 정조는 이곳을 살펴보고 "북쪽의 우뚝한 산과 흘러드는 한강의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대고 봉황이 나는 것 같아 억만년 가는 국가의 기반을 의미하는 듯하다."라며 '용양봉저정'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정조 이후에도 많은 왕이 이곳을 이용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유락시설로 쓰일 정도로 크게 훼손되었다. 지금은 주변 대부분이 사라지고 용양봉저정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화성능행도병』의 「한강주교환어도」를 통해 그 당시 용양봉저정을 비롯한 노량행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용양봉저정 건물은 팔작지붕과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부는 원래 마루와 온돌방으로 꾸몄으나 온돌방은 사라지고 지금은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로만 되어 있다.
* 배다리: 교각을 세우지 않고 널판을 걸쳐 놓은 나무다리.
** 주정소: 조선 시대에 임금이 거둥하다가 머물러 낮수라를 들던 곳.
# 정자 양쪽에는 나무와 꽃들이 심겨져 있고, 작은 이름표도 달아 두었다.
# 용양봉저정에서 바라본 전경.
# 홍재전서 제14권 [용양봉저정기(龍驤鳳翥亭記) 계축년]
다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번째는 부교(浮橋)이다. 전(傳)에 부교라고 기록된 것은 바로 주교(舟橋)이다. 대체로 배로 다리를 만든 것은 주(周)나라에서 시작되었는데, 후세로 내려올수록 그 규모가 점점 발달되었다. 예를 들면 낙수(洛水)의 효의교(孝義橋), 하수(河水) 포진(蒲津)의 여러 다리 들이다. 그 규모는 모두 수많은 큰 배들을 가로로 길게 연결한 다음 긴 널빤지를 엮어서 묶고, 아름드리 통나무를 매달아서 고정시키는데 그 신묘한 효과와 쓰임새가 큰 자라를 죽 이어 놓은 것이나 무수한 물고기들을 물 위로 뜨게 하는 것에 버금간다.
내가 해마다 현침(顯寢)에 갈 때면 의위(儀衛) 문제 또는 공억(供億)에 필요한 것들로 대농(大農)에서 나오는 것들은 모두 장영(壯營)에서 정리하도록 하고 있으나 나루를 배로 건너자면 그 역사가 너무 거창하고 비용도 너무 과다하기 때문에 노량강(鷺梁江)에다 주교를 설치하고 관사를 두어 그 일을 맡게 했으며, 강가의 작은 정자 하나를 구입하여 주필(駐蹕)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 정자의 옛 이름은 망해(望海)였는데, 그 이름의 유래는 발돋움을 하고 서쪽을 바라보면 허명(虛明)한 기운이 떠오르고 거기가 바로 우리나라의 서해(西海)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 그 정자가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만하다.
그 주교가 만들어진 이듬해인 신해년에 내가 그 정자에 올라갔더니 때마침 먼동이 트고 해가 떠오를 무렵이어서 붉은 구름이 뭉게뭉게 떠오르고 새하얀 비단이 맑게 깔려 있어 마치 떨어지는 것 같고, 공수하고 있는 것도 같고, 상투 같고, 쪽진 것도 같은 강 주위의 여러 봉우리들이 발과 안석 사이로 출몰하면서 해기(海氣)가 비치고 있고, 천리나 푸른 출렁이는 바다는 곧 손에 닿을 듯이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다 거두어들일 것 같았다. 내 그것을 보고서야 그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정자의 조망이 좋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이 정자는 부교를 위해 필요한 것이지 겨우 시인이나 일 없이 노는 선비들이 흐르는 물을 보고 시원함이나 느끼고 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정자도 옛 이름에다가 새로 발견된 것들을 곁들여서 새로 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연신(筵臣) 중에서 누가 내게 아뢰기를, “옛날 영락(永樂) 연간에 금수교(金水橋)가 완성되자 황하에 얼음이 얼고, 영감(靈感) 있는 여러 모양의 구름들이 나타나고, 경운(慶雲)이 마치 태양처럼 둥글게 뭉쳤으며, 어좌(御座) 바로 앞에는 오색화(五色花)가 나타나 이에 뭇 신공(臣工)들이 성덕서응시(聖德瑞應詩)를 지어 송덕을 했습니다. 지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운 지도 오래되어 여러 대에 걸쳐 성명(聖明)한 임금이 나셨고, 모든 물자가 풍부하고 백성들도 많아졌으며, 마을마다 집들이 즐비하고, 강과 바다에는 노와 돛이 가득하여 그것들이 태평성대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모(羽旄)를 따라 몰려드는 강가의 사녀(士女)들도 모두 다리가 이루어진 것을 함께 기뻐하고, 정자가 국가 소유로 된 것도 기뻐하고 있으니 인심이 어떻다는 것을 알 만하지 않습니까. 비록 얼음이 얼지 않고 오색화가 나타나지는 않았더라도 인화(人和)가 바로 얼음이 얼고 꽃이 핀 것이니, 이 정자 이름을 서응(瑞應)으로 하지요.”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서응도 물론 좋으나 지금 보면 북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하고, 동에서는 한강이 흘러와 마치 용이 굼틀굼틀하는 것 같고, 봉이 훨훨 나는 듯하다. 찌는 듯한 광영(光榮)이 서기로 엉기어 용루(龍樓)와 봉궐(鳳闕) 사이를 두루 감싸고 있으면서 앞으로 억만년이 가도록 우리 국가 기반을 공고히 할 것이니 그렇다면 그 상서가 어찌 얼음이나 오색화 따위 정도이겠는가.” 하고는 그 자리에 나온 대신(大臣)에게,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라고 크게 써서 문지방 위에다 걸게 하고, 이어 그 내용을 이와 같이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 정자 뒤켠 오른쪽에는 무너지 건물 부재인 석재가 쌓여 있다.
# 정자 뒷편에서 바라본 모습.
# 실내에는 정대의 능행과 관련된, 행차도 재현 그림이 걸려 있다.
서울에서 수원에 다녀 오는 기간이 총 8일이나 걸렸다는 걸 알 수 있다. 지금은 수원 행궁까지 30분이면 가는 거리가 되었다.
# 현재는 정면의 고층 건물로 인해 북한산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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