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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광저우박물관

2019_광저우(廣州)10_광저우박물관7_3층

by isanjo 2019. 12. 2.

2019_광저우(廣州)10


# 광저우박물관7_3층


◆ 전(甎)

- 영가 연간에 만든 것이다. 영가(永嘉) 7년.....


◆ 영남(嶺南) 도치(道治)

- 광주는 8세기 이후 "通海夷道"의 기점이 되었으며, 해로 무역이 날로 흥성하여 다원문화가 모이게 되었다. 대유(大庾), 영도(嶺道) 등 상로의 개척은 영남과 강남, 중원 등지의 경제와 문화의 소통을 촌직하였다. 경제 발전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여 광주성의 범위가 확대되어 "州城三中"의 구조가 형성되어 고대 도시 건설의 중요한 시기로 진입하였다.


# 무역항의 번영

- 당나라 정관 원년(627) 조정에서는 전국을 "嶺南" 등 10도로 나누었는데 영남도는 광주가 다스렸다. 당 왕조가 다유령 노선을 개척하면서 ""廣州通海夷道"의 흥성을 통해 광주가 중국과 해외 여러 나라와 통상하는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당조에서는 광주에 시박사(市舶使)를 두어 해외무역을 관리하게 하였다. 이 때 광주는 이미 내외항에 부두가 있어 외국상인과 사신들이 운집했는데 페르시아, 이슬람[아랍] 상인들이 외국 상인의 주체가 되었다. 외국의 배와 상인들이 왕래하면서 해안에는 화물과 화폐가 끊임없이 유통되어 고아주항의 개방과 번영이 부각되었다.  







◆ 주강(珠江) 부두의 나무 말뚝

* 굵기가 어마어마하다.

- 이 말뚝은 선박을 해안에 묶어두는 밧줄을 매어 두던 것이다. 덕정중로 부두 유지에서 지금의 주강 북쪽 해안까지 약 700m 기초는 벽돌과 목제의 구조물로 되어 있다.  고고학 발굴로 "개원통보(開元通寶)"와 각종 도자기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나라 때 광주는 전국의 해외 수출 도자기를  한 고곳에 모으는 출구항의 하나라고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 금질국화소완(金質菊花小碗)

# 금으로 만든 국화모양의 작은 주발

- 송대(宋代)


◆ 은질연판인화고족배(銀質蓮瓣印花高足杯)

# 은으로 만든 연밥모양에 꽃을 새긴 굽이 높은 잔

- 당대

- 당대의 금은 기물은 서아시아지역의 공예기술을 흡수하여 기예가 뛰어나며 장식의 풍격이 다양하고 조형미가 뛰어나다. 이 한 시기에 중국에서 제조한 금은 기물은 또 광주라는 출구를 통해 일본, 동남아시아 등에 도착하였다.


◆ 각지에서 주조한 개원통보(開元通寶) 동전

- 당대

- 1944년 덕중정로(德政中路) 출토

- 개원통보는 "廣", "潭", "興", "昌"가 새겨진 동전이 있는데, 이것은 댕대 영남도인 광주, 강남서도인 담주(潭州), 산남서도은 흥원부(興元府), 양주(揚州)에서 주조한 것을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당대에 광주와 중원 각지역의 무역의 왕래가 빈빈하여 화폐 유통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 연문장방전(蓮紋長方磚)

# 연꽃문양 장방형 벽돌

- 당시

- 수당도독부 유지 출토

- 남월왕궁박물관 소장


◆ 귀면와(鬼面瓦)

- 당대

- 광주시 문물고고연구원 소장


◆ 황유호인용(黃釉胡人俑)

# 황색 유약을 바른 호인 허수아비_토용

- 당대

- 도용의 얼굴과 복시은 확실하게 서역 사람의 특징인 운푹 파인 눈과 높은 코에 수염을 길게 기르고 머리에는 털모자를 쓰고 몸에는 둥근 옷깃에 좁은 소매가 있는 외투를 입고 있다. 당나라 때는 일찌기 많은 호인들이 해로나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은 상업이나 종교와 예술 활동 외에도 소수는 궁궐이나 귀족에게 고용된 노복으로 고용되었다.

* 한 손으로는 호리병을 들고 있다.



# 인상척성(因商拓城)_상업의 번창으로 인해 성을 확장하다.

- 당대의 광주는 단계별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州城三重"의 도시 형태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남성문에서 시작해 자성문에서 관아문에 이르끼까지 횡대로 되어 있다. 성역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지금의 월화로(越華路)부터 남쪽, 창변로(倉邊路)부터 서쪽, 화녕로(華寧路)부터 동쪽, 대남로와 문명로부터 북쪽까지를 포괄하는 큰 지역에 이르게 되었다.

...



◆ 척와식(脊瓦飾)

# 용마루 기와 장식

- 남한(南漢)

- 2003년 중산4로 치미재(致美齋) 공사현장에서 출토

- 광주시 문물고고연구원 소장

- 통와(筒瓦:반원통형 기와)의 끝부분에 진흙으로 빚은 짐승의 머리를 붙이는데 이를 드러내고 입을 일그러뜨린[매우 흉악한 몰골]형태로 빚어서 용루 위에 붙이는 달리는 짐승을 만들었다.


◆ 황유연화문포지전(黃釉蓮花紋鋪地磚)

- 남한

- 2003년 중산4로 치미재(致美齋) 공사현장에서 출토

- 광주시 문물고고연구원 소장

- 벽돌 안쪽에는 연꽃송이가 있고 바깥쪽에는 겹쳐진 연꽃이 있다. 모서리에는 각각 한 떨기의 가지를 꺾은 국화문으로 장식하였는데 가공기술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 도척수(陶脊獸)

# 질로 만든 용마루 짐승

* 일반적으로 망새라고 하지만, 용머리 모양은 용두(龍頭), 올빼미꼬리 모양은 치미(鴟尾)라고 특정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외에도 치문(鴟吻), 치미(蚩尾), 치문(蚩吻), 용미(龍尾), 용문(龍吻), 문수(吻獸), 이문(螭吻) 등 다양하다.

- 남한

- 2003년 중산4로 치미재(致美齋) 공사현장에서 출토

- 남월왕궁박물관 소장


◆ "芳華苑"이 주조된 철화분[芳華苑鐵花盆]

- 남한

- 이 화분은 남한 대유(大有) 4년(931)년에 주조된 것이다. 화분의 양면에 명문이 주조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유 4년 겨울 11월 1일(갑신)에 주조했다. 방화원에 바치니 영원히 사용하라[大有四年冬十一月甲申朔造" "供奉芳華苑永用]"

방화원은 남한 황제 유암(劉巖)의 별궁으로 지금의 광주성 서쪽 여지만(荔枝灣) 일대로 남한 제왕들이 연회하던 화원이다.



# 남한(南漢) 국도(國道) 

- 후량(後梁) 정명(貞明) 3년(917) 류암(劉巖)이 광주에서 황제를 자칭하며 광주를 고쳐서 흥왕부(興王府)라고 하고, 국호는 대월(大越), 연호를 건형(乾亨)으로 하였다가 이듬해 국호를 한(漢)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역사에서 남한(南漢)이라고 칭한다. 남한이 영남을 차지한 것이 55년간인데 이 때는 오대십국시기에 존재했던 시간이 비교적 긴 지방 독립 왕국이다. 한한은 무역에 힘써 광주의 경제문화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며 도시의 건설 또한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 남한 세계도

- 역사는 유암을 시작으로 4대에 걸쳐  55년간이다.


◆ 포씨가족묘비(蒲氏家族墓碑)

- 청대

- 이 비석은 청나라 광서 16년(1891)에 중각되었는데, 아랍인인 포씨 가족 송대에서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생활했던 정황을 기록하였다. 그들은 송나라 때 중국에 들어와  중국에 정착한 이래 중국의 성씨로 고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그 후손이 과거를 거쳐 벼슬길에 올라 조정의 관리에 임명되었다. 남송 때 포수경(蒲壽慶)의 한 갈래가 광주에서 천주(泉州)로 이주하였다.


◆ 호인용(胡人俑)

- 송대



◆ 송대에 유통되던 각 조대(朝代)의 동전

- 송대


◆ 숭녕통보(崇寧通寶)

* 오른쪽에서 시계방향으로 읽는다.


◆ 서촌요 청유채회화헤대반(西村窑 靑釉彩繪花卉大盤)

- 북송 시기

- 필리핀 해상에서 출토


 

◆ 서촌요 자기 잔편(西村窑瓷器殘片)

# 도자기 파편

- 북송

- 광주 서촌 황제강(皇帝崗) 출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