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1_교토(京都)15_교토박물관7_고고(考古)
<https://www.kyohaku.go.jp/jp/collection/meihin/kouko/>
◆ 물이 흐르는 것 같은 문양이 있는 동탁[流水文銅鐸]
- 높이 46.1cm
- 야요이시대(弥生時代) (기원전 1세기 무렵)
- 교토부 요사군(与謝郡) 가요초(加悦町)
- 아카시 스시 신사(明石須代神社) 경내 출토
- 중요미술품
- 교토 국립박물관
동탁(銅鐸)*은 야요이 시대에 근기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농업 공동체의 제사에 사용된 제기이다. 평상시는 마을에서 떨어진 구릉의 꼭대기 부근 등에 묻었다가 제사 때 땅속에서 꺼내 사용했다고 생각된다. 동탁의 가장 큰 특징은 몸에 주조된 유려한 물이 흐르는 것 같은 문양이지만, 이것은 야요이 시대 중기 초반의 기내 토기 의 물이 흐르는 것같은 문양의 초기형태로 동탁의 표면에 맞게 변화시킨 것이다.
# 동탁(銅鐸) : 종 모양의 청동기. 祭器 또는 악기로 사용되었다고 함.
◆ 3가지 색의 유약을 바른 유골보관용기[三彩釉骨蔵器]
- 높이 22.5cm 가운데 지름 27.6cm
- 나라시대(奈良時代) 8세기
- 와카야마현 이토군 타카노구치마치 기타나고소(和歌山県 伊都郡 高野口町 北名古曽) 출토
- 중요문화재
- 교토 국립박물관
기물의 모양은 마사쿠라인(正倉院)의 약병과 닮았지만, 그 속에는 화장된 뼈가 들어 있었다. 뚜껑과 몸체 모두 백색, 녹색 및 갈색의 삼채 유약이 반점 모양으로 되어 있다. 그 색조는 선명하고, 기물의 모양은 그 수법 등으로 볼 때 나라시대의 작품으로 생각되나 나라 삼채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본 물건은 내부가 원형으로 파인 활석으로 만든 상자에 들어 있었지만, 남은 건축물에 대해서는 돌궤에 매장되어 있던 외에는 어떠한 시설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쇼와 38년 10월 출토.
◆ 장식이 부착된 도기[装飾付須恵器]
- 높이 37.5cm
- 고분시대(古墳時代) 6세기
- 효고현 용노시 닛산 니시노미야야마(분兵庫県 竜野市 日山西宮山 古墳) 출토
- 교토 국립박물관
굽다리 호리병의 어깨에 4개의 작은 호리병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사람들의 생활과 사람과 동물이 흐뭇하게 함께 즐기는 모습을 표현하여 장식하였다. 씨름[스모:相撲]하는 2명을 지켜보는 사람, 막대를 메고 등에 짐을 진 사람, 사슴을 따라잡는 두 마리의 개와 사냥꾼의 긴박한 상황, 다른 한 곳에 단편으로 보이는 개 등이 있다. 도기에 이런 장식을 더하는 것은 6세기 전반 무렵에 특히 활발하였는데, 가로 구멍이 있는 형식은 석실분에 제기로 매장된 토기의 하나였다.
# 굽다리에 가로 구멍이 있는 형태는 신라 토기에서도 나타난다.
<신라토기>
- 이 2개의 토기를 합치면 위에 있는 모습이 된다.
◆ 4명의 신선과 4마리 짐승 그림이 띠처럼 되어 있는 거울[画文帯四仏四獣鏡]
- 지름 24.1cm 무게 1.87kg
- 중국 진대(晋代) 4세기
- 중요문화재
- 교토 국립박물관
백동(白銅)으로 만든 양질의 거울로 거울 뒤편의 문양이 매우 뛰어나다. 문양은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성되어 있고, 테두리에는 마름과 구름 문양이, 그 안쪽에는 금수(禽獸)를 배치하였다.
안쪽 바깥쪽에는 반원, 방형의 띠가 교차로 배치되고, 방형 안쪽에는 「고작명경 유련삼상(吾作明鏡 幽錬三商)」으로 시작되는 명문이 주조되었다. 안쪽의 주 문양은 紐 [끈을 맬 수 있는 곳]의 주위에 4개의 乳 [꼭지 모양]를 배치하고, 4마리의 짐승이 놓여있는데 짐승의 사이에는 불상이 배치되었다. 그 불상은 연꽃문의 光背를 가진 主像에 좌우로 座像의 부처를 따르는 것과 광배를 가진 좌상의 주불의 옆에 입상을 따르는 부처들이 각각 마주 보고 있다. 神像 대신 불상을 배치한 거울은 일본에서는 6개 정도가 고분 등에서 출토된 사례가 알려져 있다. 거울은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지만, 상자의 글씨에 「가와치 쿠니쿠 고네지지(河内国金剛輪寺)」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이 부근에서 출토라고 생각된다.
◆ 찰흙으로 빚은 남자 토용[埴輪男子像]
- 높이 75.0cm
- 고분시대(古墳時代) 6세기
- 군마현 오타시 와키야 (群馬県 太田市 脇屋) 출토
- 중요미술품
- 교터 국립박물관
인물 토용은 집 모양 토용이나 모자·さしば·방패·갑옷 등의 器財 토용, 물새나 말 등의 동물 토용에 이어 5세기 중반부터 고분을 장식했다. 특히 인물 토용은 관동 지역에서 성행하였는데, 그 종류도 무녀나 춤추는 사람, 잘 차려입은 사람, 武人, 농부, 거문고를 연주하는 사람, 매부리[매를 관리하는 사람] 등 호족부터 서민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이 인물 토용은 초립을 쓰고, 큰 총각[みずら]을 묶어, 丸玉의 목을 장식을 한 남자로, 허리에는 단도를 띠고, 오른쪽 어깨에 괭이를 메고 있다.
가로 구멍식 석실의 보급에 의해 장례 제도도 바뀌어 마치 죽은 자를 보내는 것처럼 다양한 인물이나 동물이 석실의 전면에 늘어서 있었다. 인물 토용은 당시의 복장이나 풍속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 백만탑(百萬塔)
- 호류지(法隆寺) 전래
- 높이 21.0cm 밑지름 10.0cm
- 나라시대(奈良時代) 8세기 후반
- 교토 국립박물관
평면 원형의 3층 소탑이다. 텐헤이 보자(天平宝字) 8년(764) 에미오시카츠(恵美押勝)의 난 뒤에 칭토쿠 천황(称徳天皇)이 국가의 안정을 기원하며 백만 개를 만들게 한 것에서 이 이름이 생겼다. 완성 후에는 토다이지(十大寺)에 10만 개씩 나눠졌지만 지금은 호류지에만 전해지고 있다. 탑신과 相輪[탑 꼭대기 장식]은 별도의 나무이다. 탑신에는 원통형의 구멍이 뚫려 다라니경(陀羅尼經)이 들어 있다. 제작 연월일이나 작자의 이름을 묵서한 것이 많아, 본 사례에서도 탑 이면과 상륜 최상층에 묵서가 보이지만 표면에 칠해진 백색 안료 때문에 글자가 명확하지 않다.
◆ 돌출된 선과 단추 형태의 가사 문양 동탁[突線鈕式袈裟襷文銅鐸]
- 높이 107.0cm
- 야요이시대(弥生時代) 후기. 3세기
- 쿄토부 요사군 노다가와마치 히쿠아마기(京都府 与謝郡 野田川町 比久尼城) 출토
- 교토 우메린지(梅林寺)
- 중요문화재
에도시대에 매림사(梅林寺) 근처의 히쿠 아마기 성(比久尼城)에서 출토했다고 전해지는 동탁(銅鐸)이다. 동택은 鈕[꼭지]가 끈을 매다는 기능을 잃는 과정에 따라 4개의 형식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지만 이 동탁은 그중 가장 새로운 돌출된 선모양 끈이 있는 형식[突線鈕式]에 속한다. 더욱 자세하게 말하면 突線鈕式 중에서도 가장 새로운 다섯 번째 형식이라고 하겠다. 이 단계가 되면 전체 길이 1m를 넘는 대형이 되어 몸에는 "突線"이라고 불리는 굵은 선이 가로세로로 장식되게 된다. 이 우메린지(梅林寺) 소장된 동탁은 같은 형식의 동탁 중에서도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당시의 주조 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 숭복사 사리함[崇福寺舎利容器]
- 사리함용기 높이3.0cm
- 아스카시대(飛鳥時代) 7세기 후반
- 오쓰시 시가리마치 나가오(大津市 滋賀里町 長尾) 출토
- 시가(滋賀) 오미진구(近江神宮)
- 국보
숭복사(崇福寺)는 오쓰경 진호(大津京 鎮護)에 있던 절로 덴지 천왕(天智:668~671) 시기에 창건되었다. 堂塔은 타니가와(谷川)를 분리한 세 개의 능선으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다. 탑터의 발굴조사가 昭和 13년(1938)에 행해져, 心礎[탑의 중심 이 되는 기둥의 초석]의 측면에 있는 사리공으로부터 사리 용기와, 이것을 넣는 바깥 용기 및 이것에 수반하는 각종 장엄구가 출토했다.
사리 용기는 금은의 뚜껑을 가진 녹색 유리제 작은 호리병, 수정같은 사리 3알이 담겨 있었다. 바깥 용기는 금제·은제·금동제의 상자가 중첩되어 있다. 장엄구로 자수정·유리구슬·단단한 옥으로 만든 둥근옥·민무늬 은전·금동 쇠거울·구리 방울 등이 동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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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 소야모인 묘지[金銅小野毛人墓誌]
- 길이 58.9cm 너비 5.8cm
- 나라시대(奈良時代) 8세기 전반
- 교토시 사쿄구 가미코노(京都市 左京区 上高野) 출토
- 교토 숭도신사(崇道神社)
- 국보
게이쵸(慶長) 18년(1613)에 지금의 교토시 사쿄구 가미타카노(左京区 上高野)에서 오래된 무덤이 발굴했을 때 석실 안에서 1개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오노노 에미시(小野毛人)*의 묘지(墓誌)였다. 그 후 묘지는 원래의 무덤에 넣었지만, 메이지 연간에 도난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다이쇼(大正) 3년(1914)에 보존을 위해서 꺼내졌다.
묘지는 구리로 주조한 형태로 문자를 새긴 후에 도금한 것이다. 문자는 양면에 있다. 표에 小野毛人는 천무 천황을 섬길 때 직언하는 직책을 맡았으며 뒤에 형부경(刑部卿) 정4품에 해당하는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묘지가 만들어진 것은 나라 시대가 된 이후의 것이다. 오노노 에미시(小野毛人)는 견수사(遣隋使) 카노 유키 사오노(小野妹子)의 아들이지만 묘지에 기록된 것 이상은 모른다.
# 오노노 에미시(小野毛人:おの の えみし): 아스카시대 관료이다. 견수사가 되어 607년 수나라로 건너가, 다음 해 수나라 사절 배세청(裴世清)과 함께 귀국했다.
◆ 천인 문양 벽돌[天人文せん]
- 1변 약 39cm 두께 약 8cm
- 아스카시대(飛鳥時代) 7세기 후반
- 나라현 다카이치군 아스카 카무라 오카(奈良県 高市郡 明日香村 岡) 출토
- 나라 오카지(岡寺)
- 중요문화재
평면이 거의 정방형의 기와와 유사한 벽돌이며, 한 면만 문양이 있다. 문양이 있는 면은 폭이 약 3.8cm의 바깥 테두리가 둘러싸지만 여기에는 무늬가 없다. 안쪽에는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스카프를 걸치고 하늘을 천인을 나타내고 있다.
몸에 얽힌 천의(天衣)는 우아하게 물결치고 있다. 머리카락은 위쪽으로 올라가는 것과 아래쪽으로 처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하늘에서 춤추고 내려온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문양이 있는 벽돌은 사례가 극히 적고, 매우 비슷하게 만든 것으로 오카데라(岡寺) 출토라고 전하는 봉황문의 선을 볼 수 있는 정도이다. 아마 신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고, 본존스 야단(本尊須弥壇)의 허리 등에 끼워진 것일 것이다.
◆ 금동으로 만든 "위나 오무라" 의 유골 용기[金銅威奈大村骨蔵器]
- 높이 24.2cm
- 아스카시대(飛鳥時代) 707년
- 나라현 카시바초(奈良県香芝町) 출토
- 오사카(大阪) 시텐노지(四天王寺)
- 국보
에도시대의 명화(明和) 연간(1764~1772)에 발견된 것으로, 쓰레기를 덮은 아래에서 이 유골 보관 기물이 출토했다고 전한다. 공 모양의 용기로, 뚜껑과 몸이 반원형으로 나뉘는 특수한 형태이다. 이것과 닮은 것으로 사가현 출토라고 전해지는 명문이 없는 것이 있다.
위나 오무라(威奈大村) 유골 보관 기물은 뚜껑 뒤에 1행 10자에 39행 391자에 이르는 명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는 위나 오무라(威奈大村)가 선화천황(宣化天皇)의 후손에 있어서 지통(持統) 시기에 임관되어 문무(文武) 시기에 소납언(少納言)*으로 대보령(大宝令) 제정과 함께 종5품, 즉 귀족의 배열에 올랐다. 경운(慶雲) 2年(705)에 えちご(越後) 守에 임명되지만 경운 4년에 임지에서 죽었다. 그리고 고향인 야마토(大和)의 가쓰라시로군 산군리(葛城下郡山君里) 지금의 카시바시(香芝市) 穴虫에 장사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 소납언(少納言) : 벼슬 이름의 하나, 太政官의 제3등관. 中納言의 아래 벼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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