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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베이징 중국국가박물관

2024_0820_베이징국가박물관21_4층 북19_중국고대옥기5

by isanjo 2024. 12. 8.

2024_0820_베이징국가박물관21_4층 북19_중국고대옥기5

 

# 만당경화(滿堂琼華)_제4단원

- 제국의 사치에서 대중적 우아함으로[滿堂琼華]

- 옥은 한나라(기원전 202년~서기 220년)때부터 귀중한 생활용품과 감상용 물품으로 사용되어 왔다. 옥재의 진귀함과 관청의 통제로 인해 이러한  유의 옥은 주로 제왕과 귀족의 집에서 유행했으며 그 수량도 제한되어 있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두 시대에는 중국 고대 옥기 발전의 정점으로, 옥기 제품의 종류와 수량에 있어서 이전 각 왕조를 능가했다. 이 한 시기의 옥기 제작은 정교함에 우아함과 소박함을 동시에 강조하여 궁궐의 옥과 민간의 옥이 모두 보조를 맞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를 계승하여 새롭게 고풍스러운 이기(彝器), 정교하고 화려한 생활 옥기, 우아하고 고고한 문방 용품들은 당시 옥기예술의 주류로, 조형과 문식이 연결되어 "그림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고, 의미에는 반드시 길상있다."는 전통은 문인화의 구도와 시사(詩詞)의 연구에 대대적으로 나타나 안정되고 평화로우며, 번영하고 풍요로운 사회의 면모를 반영하였다.

 

 

# 비취(翡翠)
- 비취는 원래 중국 남서부에서 자라는 두 종의 새[물총새]를 가리키는데, 수컷이 비이고, 암컷이 취이다.  이후에 비취는 하나의 단어가 되어 하나의 옥석의 품종, 즉 휘석옥이 되었다. 비취의 주산지는 미얀마로 색채가 알록달록하고 수정처럼 맑고 반투명하여 명나라 중기에 중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중국의 유교 문화에서는 모두 절제된[中庸]되고 안으로 수렴하는[內斂] 특성 때문에, 따뜻한 색상의 섬석류(閃石類)의 옥기와 비취는 모두 중시되지 않았다. 청나라 말기에 자희태후[慈憘太后 (1835-1908) :서태후]가 유독 비취를 좋아하여 항상 각지에서 비취 제품을 구하게 되었고, 비취는 그제서야 민간에서도 차틈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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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취반지(翡翠扳指)

- 청대_1644~1911.

 

 

 

 

#  융관동서(融貫東西)_동양과 서양의 통합_문화 간 융합.

당나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시대에는 동서양의 교통이 발달하여 외국과의 교류가 잦았다. 외래문화, 특히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와 유럽의 문화가 지역 옥기의 생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으며, 비교적 대표적인 것으로는 호인(胡人)과 사자모양, 불교의 주제와 과련된 옥기와 또 세속의 패식에 스며들었다.

청나라 중기 조정은 한쪽으로는 전통 옥기 생산의 우수성을 제창하는 한편, 한쪽으로는 조공 체제를 새롭게 개척하여  인도, 파키스탄 지역의 힌두스탄[인도+파키스탄] 스타일의 옥기가 도입하고, 아울러 모방하여 만들고, 미얀마의 비취도 이 시기에 중국에 들어와 청나라 말기 이후부터 사회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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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문양이 있는 꽃잎모양 아가리가 있는 굽다리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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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고이기(仿古彛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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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연호(鼻烟壺)